잃어버린 여행가방
밤 9시 산티아고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니 비행기 좌석을 다시 배정해야 한다고 한다. 푼타아레나스에서 수속을 할 때 시드니행까지 좌석을 예약을 했지만, 체크인 담당자는 패 일언하고 좌석을 재배정해야 한다는 것. 거기에다 호주는 전자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이 비자를 발급받는데 무려 1시간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러니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국제공항은 3시간 전에는 도착을 해야 한다. 특히 국내가 아닌 외국의 국제공항은 잡다한 사정이 통하지가 않고, 자기네들 규정대로 움직이므로 좌석 컨펌을 하는 것을 잊지 말고 적어도 이륙시간 3시간 전에는 도착하여 느긋하게 공항 일을 보아야 착오가 없다.
비자 발급을 끝내고 큰 배낭을 부쳤다. 배낭이 콘베이어 벨트를 통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데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든다. 저 배낭은 오클랜드, 시드니를 거쳐, 퍼스까지 갈 짐이다. 갈아타기를 할 때는 사람도 짐도 갈아타기를 해야 하는데, 사람이야 제발로 찾아서 가지만 배낭은 다른 사람이 옮겨주어야 한다. 이번 여행기간 중에도 모스크바- 런던- 베를린으로 갈아타기를 하면서 짐이 늦게 오는 바람에 애를 먹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짐을 부치고 나서도 시간은 1시간정도 남아있었다. 그러나 산티아고 공항은 밤이 되면 거의 모든 면세점이 문을 닫는다. 아직 칠레 돈 14,000페소가 남아있는데 쓸데가 없다. 공항 내를 잠사 서성거리다가 우리는 홀 광장에 쌓아놓은 여행가방 조형물을 다시 만났다. 지난번 이스터 섬에 갈 때에도 마주쳤던 가방 탑이다.(▲사진 : 산티아고 국제공항에 쌓아놓은 여행가방 조형탑. 마치 여행자들의 잃어버린 여행가방을 모아놓은 것처럼 보인다.아내의 잃어버린 여행가방도 이곳으로 돌아올까?)
여행 가방 탑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페루 리마에서 도둑을 맞아 잃어버린 아내의 여행 배낭이 떠오른다. 아내 역시 그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잃어버린 아내의 여행 가방은 어디로 갔을까? 아슬아슬하게 쌓아놓은 여행가방 조형물은 마치 여행자들이 잃어버린 여행 가방을 모아서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 형형색색의 여행가방이 주인을 기다리듯 홀 가운데 탑을 이루고 있다.
“백 개가 넘는 주사기와 약이 잔뜩 들어있는 여행가방을 훔쳐간 도둑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허망하기도 했겠지만 주사기를 보고 당신이 마약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을 하고 혹 히로뽕이나 코카인 등 마약을 있는지 가방을 구석구석 뒤져 보았는지도 모르지.”
“허긴, 그럴 수도 있겠군요.”
배낭 여행자에게 있어서 여행가방이란 어쩌면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때 묻은 여행 가방은 여행자에게 꼭 필요한 필수품을 저장하여 세상의 이곳저곳으로 옮겨주며, 때로는 베개로, 때로는 잠자리로, 삶의 저장고 같은 역할을 해준다. 그러니 여행 가방은 어쩌면 배낭여행자의 영혼까지도 담고 다니는 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내가 일생 끌고 온 이 남루한 여행가방을 열 분이 주님이기 때문일 것이다.”(박완서, '잃어버린 여행가방' 중에서)
박완서님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는 내 여행가방을 기만할 수 없다. 내 인생의 땀과 영혼을 송두리째 담아주어 세상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게 해주는 여행가방은 내 몸의 일부와도 같은 것인데 어찌 기만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쩐지 아내의 잃어버린 여행가방이 어디선가 걸어서 올 것만 같은 환상에 젖어있는데, 시드니행 란 칠레 비행기를 탑승하라는 페이징이 울려나온다. 우리는 부랴부랴 탑승구로 향했다. 우리는 육신이란 여행가방과 등에 맨 작은 여행배낭을 걸머지고 또 다른 긴 여정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칠레 산티아고 국제공항에서 글/사진 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