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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無題)

찰라777 2010. 1. 9. 19:15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조금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다정한 사람이 우리 집 가까이 있었으면 좋겠다.

 

비오는 날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그런 사람.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야야기도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나 혹은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가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론 약간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구를 쳐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지나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지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 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우정이라면 사람들은 관포지교(管鮑之交)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내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끊임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 닦으며 살기를 원치 않고, 내 친구 또한 성현 같아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될수록 정직하게 살고 싶고 내 친구도 재미나 위안을 위하여 그저 제자리에서 탄로 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재치와 위로를 가졌으면 바랄뿐이다. 나는 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먹고 싶을 테고, 내가 핸섬하게 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 마음을 지울 줄도 알 것이다.

 

 

우리는 흰 눈 속 참대 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 있고, 아첨 같은 양보는 싫어하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을 갖기를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을 중요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으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데 매력을 느끼려 애쓸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 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애정 또한 우정과도 같아서 요란한 빛깔과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나는 반닫이를 닦다가 그를 생각하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아침 창문을 열다가, 가을 하늘의 흰 구름을 바라보다가, 까닭 모를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며, 그도 그럴 때 나를 찾을 것이다. 그는 때로 울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내게도 울 수 있는 눈물과 추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다시 젊어질 수 있는 눈물이 있으나, 늙은 일에 초초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먹을 때는 여왕처럼 품위 있게, 군밤은 아이처럼 까먹고 , 차를 마실 때는 백작보다 우아하게 마시리라.

 

우리는 푼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아니하며,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애쓰며 격려하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 두 사람을 사랑한다 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진 않으리라. 내가 길을 가다 한 묶음의 꽃을 사서 그에게 들려줘도 그는 날 주책이라고 나무라지 아니하며, 건널목이 아닌 데로 찻길을 건너도 나의 교양을 비웃지 않을 게다.

 

나도 더러 그의 눈에 눈곱이 끼더라도, 그의 잇 사이에 고춧가루가 붙었다 해도, 그의 숙녀 됨이나 신사다움을 의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인 유유함을 느끼게 될게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를 밀어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 같은 것이 아니며,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밝혀주는 불빛이 되어 주리라.

 

그러다가 어느 날 홀연히 갈 때가 오더라도 축복처럼, 턱시도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으리.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