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노고단 정상이 바라보이는 구례읍 서시천변은 매년 7월 중순이면 100만송이의 원추리 꽃이 장관을 이룬다. 지리산 노고단 원추리 일대보다 약 15정도 먼저 피어나는 서시천 원추리는 산책로 조성과 함께 구례지역의 명물로 손꼽히고 있다.
원추리는 여름을 대표하는 우리나라 꽃으로 구례군은 2002년부터 서시천을 중심으로 섬진강 일대에 관광자원으로 원추리꽃 공원을 조성해 왔다. 구례군은 매년 서시천 체육공원에서 '원추리 꽃길 걷기 대회'를 개최한다. 금년에도 7월 8일 오후 5시 30분에 원추리 꽃길 걷기대회가 이어진다. 그러나 장마가 오기 전 날씨가 너무나 가물어서 예년보다 꽃이 덜 피어나고 있다.
백합과에 속하는 원추리는 잎사귀보다 높이 올라와 한 송이씩 차례로 봉긋한 봉오리를 벌려 탐스런 꽃을 피운다. 원추리는 한 송이가 피고 지면 다음 날 옆의 꽃송이가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원추리 종류를 총칭하는 라틴어 속명 헤메로칼리스Hemerrocallis는 '하룻날의 아름다움'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또 영어 이름인 데이 릴리Day Lily 역시 하루 낮 동안 꽃이 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원추리는 한여름 뜨거운 햇볕 속에서 탐스럽고 큰 노란 꽃송이를 피운다. 백합을 닮은 원추리는 난초잎처럼 길게 뻗은 잎사귀 아래쪽에서 부챗살처럼 퍼지며 시원스레 달린다. 우리 땅에 수많은 꽃들이 피고 지지만 원추리만큼 우리 곁에 자리 잡은 꽃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옛 시인들은 원추리를 노래하면서 망우亡憂, 즉 '근심을 잊는다'는 말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원추리를 훤초, 즉 '근심을 잊게 하는 꽃'이라고 부른다. 당나라 황제는 양귀비와 함께 정원에서 모란꽃을 즐기다가 "원추리를 보고 있으면 근심을 잊게 되고, 모란꽃을 보고 있으면 술이 잘 깬다"고 노래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숙주는 "가지에 달린 수많은 잎처럼 일이 많지만 원추리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잊었으니 시름이 없노라"고 노래했다.
또 중국에는 시름을 잊게 하는 훤초(원추리)와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하도록 하는 '자완'이라는 풀이 있는데, 두 식물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게 전해 내려온다.
옛날 중국에 아주 효성이 지극한 형제가 살고 있었다. 이 두 형제는 부모를 잃자 너무도 슬퍼하며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그 슬픔이 가시지 않자 형은 이를 잊기 위해 무덤가에 원추리를 심었다. 마침내 형은 이를 보고 슬픔을 접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생은 슬픔을 잊으려는 것은 어버이를 잊으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고 자완을 심어 부모님을 잃은 슬픔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잊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무덤가 자완 옆에서 지쳐 쓰러진 동생은 앞으로의 일을 미리 알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고 한다. 시름을 잊는 것이 좋은지, 시름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좋은지는 각자의 선택이겠지만, 시름을 잊고 사는 것이 좋지않을까?
우리 집 텃밭에도 원추리가 몇 그루 있어 아침이면 노란 꽃이 피어나고 있다. 나는 요즈음 아침 마다 이 원추리 꽃을 바라보며 그날그날 일어나는 근심을 털어버린다.
이제 지리산 노고단 자락에는 야생 원추리가 끝없이 피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장마가 어느 정도 걷히면 장관을 이루고 있는 노고단 원추리 군락을 한 번 가 볼 일이다. 먼동이 트고 깊고 높은 산자락을 휘감아 도는 운해가 걷히고 나면 원추리는 그 고운 자태를 햇살에 드러내기 시작한다. 서늘한 바람이 원추리를 흔들어 깨우면, 1000고지가 넘는 노고단 자락은 원추리의 물결로 과히 장관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