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산책을 하려다가 너무 추워서 거실로 들어오니 아내가 뜨끈한 커피와 식빵으로 아침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정 선생님과 아내 셋이서 창밖을 바라보며 아침을 먹었다. 눈 쌓인 겨울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맛이란....
북유럽의 어느 여행자 숙소나 러시아 벌판의 어느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어나 토스트에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랄까? 아무튼 기분이 그랬다.
음, 바로 이 맛이야!
식빵 맛도 좋은데요?
창밖의 풍경은 또 어떻고요.
북구의 어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 들지 않소?
뭐 그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우린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 겨울풍경은 이 커피 맛처럼 싫증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오래도록 음미하고 싶은 커피맛과 풍경이다.
아무도 오지 않는 적막한 오지에서 눈 쌓인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맛이란 뭐라 형용할 수 없다.
오래전 노르웨이 최북단을 여행을 하다가 허허로운 벌판에 있는 어느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손을 호호 불어가며 마시던 커피 맛은 내 생애 가장 맛있는 커피였다. 오늘 기분이 그랬다.
오전 9시 40분, 나는 정 선생님을 소요산역으로 바래다주기 위해 동이리 마을을 빠져 나왔다. 군부대 방어진지를 빠져나오면 곧 삼화교로 가는 372번 도로와 임진교로 가는 372번 도로 삼거리가 나온다. 나는 백학 방면으로 핸들을 돌렸다.
어제(1월 2일)는 영이를 바래다주러 좌측에 있는 삼화교를 건너갔는데 오늘은 임진교 쪽으로 향했다. 어유지리를 통해 가는 길이 도중에 작년 수해로 도로가 유실되어 많이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돌아올 때는 전곡을 거쳐 임진교로 왔는데 훨씬 가까웠다. 전곡을 지나 소요산역에 가면 인천까지 가는 전철이 있다.
마을회관 앞 간판을 보니 동이리 마을에는 하루에 5회 버스가 오가는 것으로 메모가 되어 있다. 06:50, 08:30, 11:50, 15:50, 19:50으로 모두 전곡으로 가는 버스다. 지리산 수평리는 시간마다 버스가 있었는데....
"정 선생, 정초에 쉬로 왔다가 쉬지도 못하고 일만 하고 가시네."
"아니요. 함께한 3일이 너무 인상 깊었어요. 찰라님 덕분에 느낌이 색다른 DMZ에서 새해를 맞이하다니 영광입니다. "
"하하,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맙소. 운전 연습도 할 겸 종종 들려주세요."
"여부가 있나요. 일주일에 한번 와도 되나요?'
"그럼요.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참 다음에 오실 때에는 강신재의 <임진강 민들레> 좀 빌려다 주세요. 이곳 임진강에서 강신재를 다시 읽고 싶어요."
"아, 강신재요.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언제나 그녀의 책은 다시 읽고 싶은 책들이 많지요. 찾아볼게요."
정 선생님을 소요산역에 내려주고 나는 다시 전곡으로 향했다. 그녀와는 네팔여행을 함께한 인연이 있었다. 정초부터 3일 내내 서재를 정리하고 이삿짐을 정리 정돈해준 정 선생님이 고마웠다.
사서(司書)로 37년을 근무한 그녀의 독서량은 엄청나다. 그녀의 손에는 언제나 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를 생각하면 <여행과 책>이 먼저 떠오른다. 그녀는 나에게 책을 들고 여행을 떠나는 여자로 각인되어 있다.
(20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