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8일, 인도 하고도 다르질링 초우라스터 광장에서 말을 탔다. 업저버터리 힐을 돌아보고, 히말라야 등산학교에 있는 텐징 노르가이 박물관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아내와 나, 청정남 아우, 바다 선생님, 무한도전 님(69세의 그는 전 세계 오지를 무한 도전 중에 있다), 다섯 사람이 함께 초우라스터 거리에서 말을 흥정하여 말 등에 올랐다. 다르질링은 해발 2134m로 아내가 걷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고도여서 말을 타는 것은 아내를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백말을 탄 기분이 어떨까? 아우가 탄 말은 아우의 체구에 비해 어쩐지 부실해 보인다. 저 무게를 잘 견뎌 낼까? 백말을 탄 무한도전 님과 의기양양하게 말을 타고 가는 각하
바다 님과 무한도전 님은 백말을 타고, 나와 각하 아우는 갈색의 말을 탔는데 어쩐지 아우의 말이 삐쭉 마르고 힘이 없어 보였다. 어쨌든 우린 말을 타고 개선장군처럼 업저버터리 힐 둘레길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더니 이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를 피해 우린 빠드마자 나이두 히말라얀 동물원에서 내렸다. 마부들도 잠시 멈추는 게 좋겠다고 했다. 우린 비가 그칠 때까지 우산을 받고 동물원을 돌아보기로 했다.
히말라얀 동물원은 히말라야야 분포하는 동물만 모아놓은 동물원이다. 히말라야 흑곰, 시베리아 호랑이들도 보였지만 그냥 싱겁다. 자연 밀림에 방사를 하는 동물원이지만 우리에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다. 야생 사파리가 아닌 동물원은 스릴도 없고 어른들에게는 여전히 싱거운 구경거리다.우린 동물원에서 나와 히말라야 등산학교로 향했다. 다행이 비가 좀 약해졌다.
비실비실하게 보이는 동물들
히말라얀 등산학교는 1953년 에드먼드 힐러리와 같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텐징 노르가이의 묘가 있는 곳이다. 1954년에 설립된 등산학교에는 산악박물관이 있다. 그곳에는 역사적인 등산 장비 컬렉션, 히말라야 동식물 표본과 히말레 산맥의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한 모든 등산가들의 사진과 전기를 비롯하여 세계 최고봉 정복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다르질링 히말라야 등산학교와 산악박물관
여기서 잠시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텐징 노르가이에 대해서 살펴보자. 텐징 노르가이는 티베트계 네팔인으로 에베레스트 산 부근 네팔 쿰부에서 태어났다. 텐징의 본명은 '남걀 왕디'였으나 어린 시절 라마의 우두머리인 융포사의 창설자인 텐징 노르부의 충고에 다라 '텐징 노르가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했다. 이 이름은 '부유하고 행복한 신도'라는 뜻이다. 그는 13명의 형제 중 11번째였다.
야크 목동이었던 그의 아버지 밑에서 농사를 짓는 일을 돕던 그는 소년시절에 두 번이나 카트만두로 도망을 쳤다고 한다. 히 후 그는 삼촌을 따라 이곳 인도 서벵골 주 다르질링으로 가서 우유배달부, 찻잎 따기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등반 포터가 되었다.
▲에베레스트 정상 오른 텐징 노르가이의 동상
처음에는 짐을 운반하는 포터 출발했으며, 제2차 대전 후에는 포터 대장으로 수많은 등반에 참여했다. 셰르파로서 여섯 번째나 에베레스트 등정 시도를 한바 있었던 그는 1953년 텐징은 에드먼드 힐러리가 참가한 영국의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합류했다. 당시 에베레스트 탐사대는 362명의 짐꾼과 20명의 셰르파, 1만개의 짐들이 포함 총 400명 이상에 달했다고 한다.
1953년 3월 탐사대는 캠프를 설치했다. 천천히 작업을 하면서 마지막 캠프를 해발 7,890m의 사우스 콜에 설치를 했다. 5월 26일 버딜런과 에번스가 정상 등정에 도전했지만, 에번스의 산소통 불량으로 되돌아 와야 했다. 그 팀은 남쪽 정상에 도달했고, 정상에서는 91m 떨어진 곳이었다. 다음에 탐사대는 텐징과 힐러리를 정상으로 보냈다.
그 팀이 사우스 콜에서 눈보라에 이틀 동안 묶여있자, 탐사대는 5월 28일 로웨와 앨프리드 그레고리, 앙 니마 서포터 3인을 파견한다. 이 둘은 지원자들이 산을 내려가는 동안 5월 28일 해발 8,500m에 텐트를 세웠다. 다음 날 아침 힐러리는 텐트 바깥에 둔 신발이 얼어버린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2시간 동안 얼어버린 신발을 녹이면서 보냈고, 힐러리와 텐징은 14kg의 배낭을 메고 마지막 등정을 시도했다.
마지막 장애는 12m 남은 바위 면으로 이후 "힐러리 계단"으로 명명된다. 힐러리는 바위 면과 얼음 사이로 갈라진 틈에 쐐기를 박을 수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텐징을 따르게 했다. 그곳에서 다음의 노력은 비교적 쉬웠다. 텐징과 힐러리가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최초로 동시에 밟았을 때, 텐징은 그의 말로 "꿈이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 마침내 힐러리는 네팔의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지상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 정상 8,848m를 최초로 등정하였다. 그들이 정상에 머문 시간은 약 15분가량이며, 그들은 1924년 올랐다는 멜로리 탐험대의 증거를 찾았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힐러리는 얼음도끼를 들고 있는 유명한 텐징의 포즈를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텐징이 사진기를 사용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정작 자신의 사진을 남기진 못했다. 이것은 이후 논란을 일으켰다. '과연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서 사진을 찍었을까 안 찍었을까' 등이 논란이 된 것이다.
힐러리는 아래로 내려다보는 사진 등 증거를 남기기 위해 그곳에서 몇 장의 사진을 더 찍고, 그곳에 텐징은 초콜릿을 남겼고, 힐러리는 자신이 받은 십자가를 남겼다. 지금은 그 논쟁이 없어진 상태이지만 아직도 에드먼드 경은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등산한 사람으로서 뉴질랜드 5달러 지폐에 초상이 실렸다. 살아 있는 인물로 지폐에 실린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명이 된 것이다.
텐징은 인도와 네팔에서 찬사를 받았으며, 그는 부처나 시바의 화신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힐러리와 헌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였고, 텐징에게는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했다. 영국 정부는 또한 텐징이 등정 성공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성조지 훈장을 수여하였다.
▲ 힐러리가 찍어준 텐징의 사진 모델로 텐징의 동상을 만들었다.
텐징과 힐러리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기자들은 둘 중 누가 먼저 발을 딛었는지를 끈질기게 질문했다. 원정대의 우두머리였던 헌트 대령은 "그들은 팀으로서 함께 도착했다."라고 단언하였다. 텐징은 팀으로서의 단결과 그들이 이룬 성공을 강조하였다. 텐징은 사람들이 제기하는 어떤 의혹에 대해서도 무시하였으나, 힐러리가 정상에 가장 먼저 발을 디뎠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에베레스트 산에 두 번째로 올랐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면, 나는 앞으로 부끄러운 마음으로 살 것이다."
이 등정에서 또 하나 재밌는 사실은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서 찍은 모든 사진에 텐징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모든 사진에 그의 모습이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텐징은 카메라 작동 법을 몰랐다. 그리고 에베레스트 산 정상은 카메라 작동 법을 가르칠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이후 힐러리와 텐징은 평생 동안 친구로 지냈다.
텐징은 읽고 쓰는 법을 배운 적이 없으나, 몇 가지 언어를 말할 수 있었다. 그의 모국어는 셰르파였으나 네팔어에 능통했고, 그 밖에도 영어, 힌디어, 티베트어와 인도 아대륙에서 쓰이는 몇몇 언어에 대한 실용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ㅎㅎ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기분일까? 백두대간을 종주한 실력이 있는 바다님의 멋진 포즈
텐징은 후에 다르질링에서 히말라야 등산 학교의 현장훈련 감독관을 지냈다. 1978년, 그는 히말라야 트레킹을 위한 텐징 노르가이 탐험회사를 설립하였다. 이 탐험회사는 2003년부터 텐징의 아들이자 1996년에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등정한 잠링 텐징 노르가이에 의해 운영 중이다.
그는 다르질링에서 평생을 후진 양성에 힘쓰며 살다가 1986년 71세의 나이로 뇌출혈로 사망했다. 텐징은 학교 안에서 화장 되어 묻혔지만, 텐진가문의 등반 전통은 계속 이어졌다. 그의 장녀 뺌뻰은 주목할 만한 등산가였고, 아들 잠링은 1996년, 손자 따시는 1997년에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이상의 내용은 백과사전 등에서 발취함).
그러나 이제 힐러리 경도, 텐징도 이 세상에 없다. 세월이 그들을 영원히 잡아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허지만 그들이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오른 것만은 세상이 인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산악인으로 에베레스트를 첫 등정한 고상돈이 한국의 산악들에게는 기념비적인 인물이 듯이 텐징과 힐러리는 세계 산악인들이 존경하는 상징적인 존재다. 요즈음은 에베레스트를 껌을 씹드싱 올라간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산악 교통 체증이 심한 곳이 에베레스트 루트라고 하지않던가?
히말라야 등산학교에서 텐징 노르가이의 기념관을 돌아보고 다시 초우라스터 광장으로 돌아오는데 아우가 탄 말이 말썽을 일으켰다. 자꾸만 넘어지려고 비실거렸다. 그러다나 마침내 중간 지점에서 아우가 탄 말이 그만 앞무릎을 꿇고 말았다. "앗 불사!" 그러나 다행히 아우가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아우가 탄 부실한 말이 끝내 사고를 치고 말았다. 가엾은 말을 찍고 있는 아우의 모습. 미안.. ㅉㅉㅉ...
사실 이 길은 걸어가야 하는 멋진 길이다. 힘들게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텐징 노르가이의 기념관을 보기 위해서는 최소한 걸어서 가는 것이 예의다. 건강이 좋이 않은 아내를 배려하여 말을 타기는 했지만 말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러면 아내만 말을 태우고 걸어갈 일이지 왜 다들 말을 탔느냐고 반문을 할 사람도 있다. 솔직히 고백하면 다들 이 멋진 다르질링의 업저버터리 힐에서 말을 타고 다르질링의 멋진 경관을 내려다보고도 싶었을 것이다.
▲성냥갑처럼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다르질링 언덕
비가 부슬부슬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언덕에 성냥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이 구름 가렸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초우라스터 광장으로 돌아 온 우리는 잠시 비를 피해 호텔에 머물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소냐가 가르쳐 준 레스토랑으로 가 보기로 했다. 초우라스터 거리에서 우측으로 가면 좁은 골목이 나오고 작은 노점상들이 즐비하게 들어 서 있다. 그 중에서 간판도 없는 음식점에 육개장을 판다고 한다. 소냐가 한국어로 메뉴판을 적어 주었다고 하는데, 양곱자국, 왕만두, 모모, 육개장, 쇠고기 호떡 도가니탕, 밥 등이 한국말로 벽에 붙여져 있다. 육개장을 시켜 먹긴 했는데 글쎄, 맛은 별로다. 그러나 한국말로 메뉴판이 있다는 것이 향수를 불러 일으키게 한다.
초우라스터 광장 골목에 있는 이름없는 한국 음식점. 말이 한국음식점이지 맛은 별로다. ㅋㅋㅋ 이게 육개장 이랍니다~~
음식점에서 나온 우리는 거리에서 짜이 한잔 시켜 먹었다. 차라리 이 길거리에서 짜이 한 잔에 빵을 먹을 걸 했나 하는 후회가 나기도 했다. 우리는 좁은 골목을 잠시 배회하다가 다시 호텔로 들어와 휴식을 취했다. 밤이 되자 천두이 치고 소낙비가 거칠게 내렸다. 다르질링의 기후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한다. 내일은 새벽에 타이거 힐에 가서 칸체종가 일출을 바라보고, 오후에는 토이 트레인을 타기로 해서 일찍 잠을 청했으나 왠지 잠이 잘 오질 않았다.
노상에서 마시는 짜이 한잔의 맛!!!
개들은 팔자좋에 잠을 자는데 난 왜 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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