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도 인연이 닿아야 한다 '산꼭대기'라는 뜻을 가진 갱톡은 화려하다 ▲갱톡 MG광장. 마하트마 간디의 동상이 인상적이다.
드디어… ‘산꼭대기’라는 뜻을 가진 갱톡에 도착했다. 운전사 시링은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다. 라니풀Ranipul 강을 끼고 급경사를 오르니 갱톡의 터미널에 도착했다. 지프들이 다 모인 듯 터미널은 요란하다. 일행들도 다르질링에서 그 현기증 나는 길을 하루 종일 달려온 탓에 지쳐 있었다.
▲지프로 붐비는 갱톡의 터미널
사실 시킴은 2010년 10월 네팔 일람차밭에 갔다가 시킴으로 넘어오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자비공덕회 일행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시킴은 네팔국경과 바로 인접해있다. 그 당시 우리는 네팔관광청한국사무소장인 KP 시토울나님과 함께 그의 고향 칸첸중가 기슭에 있는 초등학교에 장학금을 전달하러 자비공덕회 일행 20여명과 함께 방문했었다.
한국자비공덕회는 현재 일람Ilam 근교에 있는 버드러칼리 초중고등학교Shree Bhadrakali Higher Secondary school 학생 100여명에게 학자금을 후원하고 있다. 자비공덕회는 공부를 하고 싶으나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등 집안 환경이 어려워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선발하여 후원하고 있다.
▲갱톡에는 육교도 있다.
그래서 일행들과 함께 행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부득이 시킴으로 넘어올 수 없었다. 당초 계획은 일람 차밭에서 해어져 아내와 둘이서 시킴으로 넘어와 부탄까지 여행을 하려고 계획을 했었다. 또 이곳 갱톡은 시토울나씨 부인의 고향이라고 했다. 어쨌든 여행도 인연이 닿아야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
▲시킴 갱톡의 관광지를 표시한 지도
세명의 티베트 라마승이 세운 시킴왕국
갱톡은 19세기 중반에 시킴의 주도가 된 이후 급속히 발전했다. 이렇게 깊은 산속에 화려한 도시가 건설되어 있다니 놀랍다. 갱톡의 중심가는 MG Marg(마하트마 간디 Marg)로 쇼핑센터, 은행, 여행안내소, 호텔, 레스토랑, 시장, 관공서 등이 운집해 있다.
시킴의 초결이 권력의 전성기를 누릴 때에는 드넓은 왕국을 통치했다. 그 영토가 네팔 동부에서부터 티베트의 쭘비계곡, 부탄의 하(Ha)계곡과 웨스트벵골의 산악지대 일부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 영토의 많은 부분이 나중에 부탄과의 전쟁, 네팔에서 온 구르카(Gurkha) 족과의 전쟁에서 잃어버렸다.
▲가네시 톡 전망대에서 바라본 갱톡 시내 전경. 가운데 황금색 지붕이 옛 시킴왕궁이었던 곳이다.
원래 시킴의 수도는 육솜이었다. 육솜이라는 지명에는 <세 명의 라마가 만난 장소>라는 뜻이 있다. 시킴 지방은 티베트-버마계의 부족인 렙차 족이 살던 곳이었다. 이들은 13세기 아쌈 또는 미얀마에서 시킴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그 이후 티베트 사람들은 15세기 티베트 불교 종파 간 분쟁을 피해 시킴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겔룩파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닝마파 종파는 시킴으로 망명해 오게 된다. 전설에 따르면 세 명의 라마인 꺼톡 릭씬 쳄뽀, 느가닥, 랏쑨 쳄뽀 스님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들어와 우연히 만나게 육솜에서 된다. 이들의 만남은 오래전 파드마삼바바에 의해 예언된 것이라고 전해졌다.
세 명의 라마승은 육솜에 왕국을 세우기로 하고 왕이 될 만한 인물을 찾아다녔다. 1641년 이들은 파드마삼바바의 예언에 따라 동쪽에서 시킴의 첫 번째 초결Chogyal-왕)이 될 인물인 푼쏙 남결(Phuntsog Namgyal)을 찾아 육솜의 노브르강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갱톡에서 바라본 칸첸중가. 시킴의 어느 지역에서나 문득문득 칸첸중가가 나타난다.
국민투표로 인도에 넘어간 시킴왕국
1835년 영국은 시킴의 초결을 설득하여 해마다 돈을 받는 대가로 다르질링 지역을 영국에게 할양하도록 했다. 이에 티베트, 시킴의 승려들, 그리고 상인들은 크게 반발을 했다. 당시 티베트는 시킴을 속국으로 여기고 있었고, 상인들은 다르질링이 넘어갈 경우 자신들의 부의 지위가 위험할 것으로 생각했다.
긴장이 고조되자 영국은 1849년, 현재 시킴주 경계와 갠지스 평야 사이의 모든 지역을 합병하고, 1861년 시킴을 보호국으로 선포했다. 1866년 티베트는 시킴으로 쳐들어 왔지만 영국에게 패배했다.
1947년 시킴은 인도 독립과 함께 영국-시킴 조약으로 인도에 넘어갔다. 시킴의 마지막 초결인 판덴 톤둡 남결은 1963년 왕위에 올랐으나, 시킴의 빈곤계층인 네팔인 들이 품었던 불만을 무시했다. 토지소유에 대한 반란이 만연하자, 초결은 인도에게 국가의 통치를 맡아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1975년 시킴은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7%가 인도와의 합병을 찬성했다. 그 이래로 시킴은 주로 시킴민주전선Sikkim Memocratic Front(SDF)의 통치를 받았다. SDF는 비닐봉토 사용을 금지하고 개울을 오염시키는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등 인도에서 가장 환경 의식이 강한 정부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아작도 시킴을 인도의 영토로 인정해주지 않고 있다. 시킴은 인도와 중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지역이다. 따라서 시킴 주를 여행할 때에는 대부분 여행허가서를 받아야 한다.
▲MG광장 풍경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지만...
하여튼… 시킴왕국에 입국한 우리는 갱톡에 도착했다. 계속되는 설사로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를 못해 현기증이 나고 어지러웠다. 그러나 아무나 올 수 없는 시킴왕국 갱톡에 도착하자 다시 생기가 솟아났다. 우리는 운전사 시링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지프에서 배낭을 내려 등에 걸머지고 숙소로 향했다.
“당신 괜찮아요. 뭘 좀 먹어야 할 텐데.”
“죽기 아니면 까무러지기 아니요. 속이 비어 있으니 너무 편해요. 내 걱정은 말아요.”
숙소로 가기 위해서는 고가도로를 건너가야 했다. 계단으로 올라서는 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래도 멀리 바라보이는 칸첸중가 만년설을 바라보자 다시 힘이 났다. 나는 MG광장 약국에서 설사약을 사고 잠시 산책을 하다가 곧 숙소로 갔다. 오늘은 숙소에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MG광장에 있는 약국에서 설사약을 샀다.
우리는 MG광장에서 멀지않은 숙소가 있었다. 숙소에서 방을 배정 받은 우리는 저녁을 먹으며 내일 여행계획을 함께 세우기로 했다. 저녁식사는 무한도전님이 준비해온 소형 전기밥솥에 쌀밥을 해서 먹기로 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에는 전기밥솥이 나에게 무척 요긴하게 쓰이는 날이다. 배탈이 나서 어차피 밖에서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린 무한도전님의 방에서 저녁을 먹으며 내일 이후 여행계획을 의논했다. 내일은 일단 오전에 강톡 시내를 돌아보고 오후에는 럼텍Rumtek을 가기로 했다. 그리고 모레는 해발 3780m에 위치한 쏭고호수를 가기로 했다. 럼텍과 송고호수는 둘 다 여행허가서가 필요한 곳이다.
▲MG광장의 기념품 숍
내일 오전 중에 여행허가서를 받아 두고 지프를 렌트해서 다섯 명이 함께 여행을 하기로 했다. 여러 명이 함께 해야 여행비용이 저렴해진다. 더욱이나 이번 여행팀은 환상적이라 할 정도로 팀워크가 잘 맞았다. 여행은 팀워크가 잘 맞아야 한다. 부부끼리도 의견이 맞지 않아 티격태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팀은 정말 환상적이다. 무거운 짐은 청정남님이 도맡아 들고, 요리는 아내가, 설거지는 바다님이, 준비는 무한도전님, 그리고 나는 여행계획과 사진을 담당했다.
▲갱톡 숙소에서 본 부탄 방송
나는 전기밥솥에서 나온 누룽지로 설사를 달랬다. 뜨거운 누룽지를 먹고 나니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전기밥솥을 가져온 무한도전님에게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를 드린다. 저녁식사를 하고 침대에 누워 잠시 TV를 보는데 부탄 방송이 나왔다. 이곳에서도 부탄 방송이 잡히다니 놀랍다. 아, 머지않아 도착할 부탄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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