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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킴여행⑤ 시킴왕궁과 남걀티베트학 연구소

찰라777 2013. 11. 16. 11:15

300년 동안 번성했던 시킴왕국이 멸망한 이유

 

 

▲ 가네시톡 전망대에서 바라본 시킴주의 수도 갱톡 시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중앙 정수리에 노란 지붕이 옛 시킴왕국의 왕궁건물이다.

 

 

갱톡 시내를 한눈에 바라보기 위해 가네시 톡Ganesh Tok 전망대에 올랐다. MG광장에서 산위로 10여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가네시 톡에 오르니 갱톡 시내가 한눈에 바라보인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갱톡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어디에도 평지는 없다. 과연 '산꼭대기'란 갱톡의 의미가 실감이 난다. 깎아지른 듯한 산등성이에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좌청룡 우백호의 중심 가장자리에는 유독 노란 지붕의 건물이 삼나무에 둘러싸인 채 눈에 띤다. 옛 시킴의 왕궁으로 쓰였던 쫄라캉Tsukakhang이다.

 

 ▲ 금계포란형의 명당지형에 위치한 시킴왕궁 터. 그러나 300년이 넘게 번성했던 시킴왕국도 민초들의 불만을 무시한 것이 원인이 되어 문을 닫게 되었다.

 

풍수 문외한이 보기에도 시킴왕궁은 명당 터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오대산 비로봉에서 적멸보궁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정의 중앙에 자리 잡은 왕궁 터는 풍수에서 명당이라 일컫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닭이 알을 품은 듯한 형세) 지세와 닮아있다.

 

파드마삼바바의 예언에 따라 세 명의 밀교승이 세운 시킴왕국은 저 왕궁을 중심으로 한 때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시킴의 마지막 초결(Chogyal-시킴 왕의 호칭)인 팔덴 톤둡 남걀 Palden Thondup Namgyal이 시킴의 빈곤층인 네팔인 들의 불만을 무시하자 거센 반란이 일어났다.

 

 

 

 

오대산 적멸보궁 터를 닮은 명당터, 쫄라캉

 

불교왕국이었던 시킴은 당시 토지의 대부분을 사원에서 소유하고 있었다. 토지 소유 사원에 대한 빈곤 서민층의 반란이 만연하자 남걀 초결은 인도에 국가 통치를 맡아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1975년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7%가 인도와의 합병을 찬성하여 인도의 22번째 주로 합병되고 말았다.

 

시킴의 마지막 왕인 남걀 초결은 1963년 미국사교계의 명사인 호프 쿠크Hope Cooke와 결혼을 하여 한때 국제적으로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그러나 남걀 초결이 통치권을 잃자, 호프 쿠크는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으며 1980년 이혼을 했다. 그 후 남걀은 암으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아무리 좋은 터에 왕궁을 세운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명당도 그 명당에 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살아야 한다. 1641년 세 명의 티베트 밀교승이 세워 300년이 넘게 번성하며 히말라야 최후의 상그리라로 여겨졌던 시킴왕국도 멸망을 하고 말았다.

 

우리는 전망대에서 갱톡 시내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왕궁 터로 갔다. 그러나 왕궁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일반인은 특별한 행사가 날에만 입장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나라가 인도로 넘어가 버리고 녹슨 문이 굳게 닫혀 있는 텅 빈 왕궁은 어쩐지 초라하고 쓸쓸하게만 보인다.

 

▲ 남걀티베트학 연구소로 가는 길

 

우리는 왕궁 터를 돌아 남걀 티베트학 연구소로 향했다. 남걀티베트학 연구소로 가는 길에는 하늘을 찌르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나무와 벽에는 오색 타르쵸가 휘날리고 있다.

 

남걀티베트학 연구소는 1958년 전통 티베트 양식으로 지어진 독특한 연구소로 세계 최대 규모에 속하는 티베트 불교서적 및 필사본 들을 보유하고 있다. 연구소 안으로 들어가니 실크로 수를 놓은 탕가 Thangha(탱화의 일종)가 이색적으로 눈에 띤다. 오래된 티베트 불상들이 진열되어 있고, 꺼빨리kapali(사람의 두개골로 만든 사발)와 깡링Kangling(사람의 대퇴골로 만든 피리) 등 불교예식 도구들도 진열되어 있다.

 

▲ 세계최대규모를 자랑하는 티베트학 연구소인 남걀티베트학 연구소

 

 

사람의 뼈로 만든 악기는 과연 신성할까?

 

죽은 자의 뼈로 만든 예식도구는 과연 신성할까? 티베트 인들은 육체의 죽음을 옷을 한 꺼풀 벗는 정도로 생각을 한다. 사람의 육체도 영혼이 빠져나가면 한갓 나무토막 같은 존재와 다를 바 없다는 것. 그래서인지 티베트에서는 지금도 조장(鳥葬)을 하는 풍습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토막을 내어 독수리들이 먹기 좋게 산에 진열을 해 놓는다. 그러니 낡은 육체가 죽어서 피리로 변해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준다면 이 또한 복을 짓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 남걀티베트학 연구소 내부. 오래된 티베트 불상, 탱화, 불경, 사람의 뼈로 만든 피리와 접시 등이 보관되어 있다.

 

연구소 마당에는 14대 달라이 라마의 초상화가 큼직하게 걸려있다. 티베트어로 쓰여 있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나라를 잃은 아픔과 티베트의 독립을 염원하는 의미이리라. 나라를 잃고 자유를 잃어버린 티베트인들의 한과 설움은 그 무엇보다도 크다. 티베트는 한 때 당태종이 문성공주를 티베트 송첸간포 왕에게 시집을 보낼 정도로 강성했다. 당시 이곳 시킴도 티베트의 통치를 받았다고 한다.

 

▲ 남걀티베트학 연구소 마당에 있는 달라이라마 초상. 시킴왕국도 티베트도 나라를 잃고 방황하고 있다.

 

2005년도에 나는 인도 여행 시 다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를 직접 친견하고 법회 상황을 촬영하여 KBS TV '세상은 넓다'프로그램에 소개를 한 적이 있다. 나라를 잃고 비폭력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그의 소망이 이루어질 날은 언제일까? 두 개의 잃어버린 왕국, 시킴과 티베트를 생각하니 한마음으로 국력을 키워 주변국이 함부로 넘볼 수 없도록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절로 든다. 나는 마음속으로 티베트가 하루속히 독립되기를 기원하며 티베트학 연구소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