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광과 철광이 있었다는 '금굴산'을 산책하며...
3월 8일 맑음
임진강 방생법회 장소에서 집으로 돌아온 아우와 나는 아내가 차려 놓은 밥상으로 응규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아내는 오늘 점심에도 무를 설겅설겅 썰어 넣어 민어탕을 끓였다.
점심을 먹고 나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아우와 함께 금굴산 산책에 나섰다. 청정남 아우는 금가락지를 10년 동안 드나들었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금굴산 정상에 올라 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마침 날씨도 화사하고 봄기운이 완연해서 산책을 하기에는 딱 좋은 날씨다. 친구 응규는 호박 구덩이를 좀 더 파야겠다며 텃밭으로 갔다.
▲금굴산에서 바라본 임진강
우수와 경칩이 지나면 대동강물이 풀린다고 하여 완연한 봄을 느끼게 된다. 그제가 경칩이었으니 초목의 싹이 생명력을 얻어 솟아나오고 동면하던 벌레들도 땅속에서 곧 기지개를 펴고 나올 것이다. 경칩은 만물이 약동하는 시기로, 움츠려 지냈던 겨울이 끝나고 새로운 생명력이 소생하는 절기이다.
우리는 봄기운 느끼며 윗집 장 선생님 집으로 올라갔다. 금굴산은 장선생 집을 거쳐 바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마침 장 선생님이 와 있어 잠시 장 선생님 세심원 정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그는 항상 활기가 있고 정이 넘쳐흐른다. 주로 주말에만 오는데 금년부터는 회사일을 줄이고 좀 더 자주 와서 농사일을 할 거라고 한다.
장선생 집에서 금굴산으로 오르는 길은 매우 가파르다. 우리는 참나무 낙엽 속에 발을 푹푹 빠지며 가파른 산을 올라갔다. 봄의 낙엽은 꽝 말라 푸석푸석하다. 낙엽을 밟는 소리가 부스럭 거렸다. 고라니가 후다닥 놀라며 뛰어 도망쳤다. 우리는 길도 없는 가파른 경사를 올라갔다.
“형님, 혹시 이곳에 지뢰가 없을까요? 괜히 겁이 나내요?”
“음, 있을 수도 있지. 금굴산은 6.25전쟁 때 중공군과 아군이 치열한 전투를 치른 격전장이니까? 그러나 내가 몇 번 답사를 했는데 지뢰를 밟을 염려는 없을 거야. 겨울철에 눈이 내릴 때 주로 고라니들이 다녔던 길이거든.”
“아, 그렇군요. 고라니들도 다니는 길이 따로 있는 모양이지요?”
“모든 동물들도 자신들의 길을 알고 있는데 고라니들은 먹이를 찾거나 물을 마시기 위해 길을 내서 그 길로만 다니고 있는 것 같아요.”
마지막 급경사를 지나 능선에 오르니 임진강과 남계리 벌판, 그리고 그 건너 전곡과 멀리 고대산까지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금굴산 능선에는 군 방어진지가 여기저기 구축되어 있었다. <V>자를 그으며 포즈를 취하는 아우의 모습이 천진난만하게만 보인다.
▲금굴산 정상에서 천진난만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청정남 아우
“와아, 금굴산이 상당히 높네요? 이곳 정상에 서니 연천군 전체가 한 눈에 보이는군요.”
“그래서 금굴산은 삼국시대부터 군대의 전략적인 요충지였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한국전쟁 때도 매우 중요한 군사전략 역할을 했고. 이 지역이 무너지면 동두천은 물론 의정부까지 위험해져 목숨을 걸고 사수를 했다고 해요. 여기서 치른 전투로 인해 수많은 연합군이 피를 흘리고 전사를 해서 이 아래 유엔군 화장장이 생기게 된 것이지.”
“그런데 금굴산이 이렇게 넓고 큰지 상상도 못했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작은 야산처럼 보이기만 했는데.”
아우는 금굴산 정상에 서서 동서남북으로 뻗은 금굴산 줄기를 바라보며 놀라워했다. 금굴산(金窟山)은 우정리와 경계를 이루는 곳에 높이 195.7m의 산으로 쇠가 많이 매장되어 있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금광과 철광이 개발되었으며, 채굴로 인해 산 내부가 텅 비어있어 '공굴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금굴산에서 바라본 남계리 벌판
'신증동국여지승람' 마전군편에는 미두산(尾頭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인근에 대홍수로 인하여 온천지가 물바다였는데, 산 정상만 소등에 앉은 쇠파리만큼 남았다 하여 '쇠파리산'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 내용은 마치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또 고려시대에는 봉화를 올렸던 곳이라 하여 봉화산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금굴산을 중심으로 동북쪽에는 우정리 마을이 들어서 있다. 우정리는 임진강 옆에 큰 우물인 소우물이 있어 우정리라 하였다. 금굴산 서남쪽에는 동이리마을이 있고 그 앞으로 임진강의 큰 여울인 밤여울(栗灘)이 흐르고 있다. 동이리는 6·25전쟁 전에는 개성 왕씨(開城 王氏) 8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었고, 마전군 때에는 군내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마을이었다. 동부리는 큰배울 동쪽에 있던 마을이다.
금굴산은 두 개의 능선이 말발굽처럼 뻗어있고, 그 가운데 골짜기가 꽤 깊게 들어서 있다. 사람의 발길이 뜸한 최전방 오지에 있다 보니 고라니, 노루, 너구리, 멧돼지 등 야생동물들이 상당히 많이 서식을 하고 있다. 우리가 길을 걷는 중에도 고라니들이 후다닥 뛰어 달아나는 바람에 몇 뻔이나 놀라기도 됐다. 숲 속에서 수리 부엉이가 날아오르더니 먹이를 찾았는지 급강하를 한다.
▲수리부엉이
우리는 금굴산 능선을 따라 태풍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초소를 지나 헬기장까지 걸어갔다. 헬기장 위에는 1976년에 고 박정희 대통령이 금굴산을 순시할 때 기념으로 세워진 기념비가 우뚝 솟아 있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 순시기념>이라 새긴 돌탑 밑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
“1976년 12월 22일 영하의 몹시 추운 날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이 진지를 순시 격려해 주신 것을 영원히 기념하고, 이 진지를 끝까지 사수하겠다는 우리의 결의를 모아 여기 비를 세운다. -육군 제3972부대 장병 일동-”
이 기념비를 보면 삼국시대나 지금이나 금굴산이 얼마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인가를 가늠케 한다. 우리는 헬기장에서 내려와 동이리 마을을 거쳐 금가락지로 돌아왔다. 능선을 타고 돌아오는 길이라 약 7km 정도 걸은 것 같다.
“형님 덕분에 금굴산 구경 잘 했네요.”
“오히려 내가 아우 덕분에 오랜만에 산책을 잘 했어요.”
사또 덕분에 나팔을 분다고, 아우 덕분에 산책을 잘 했다. 서울에 사는 사람이 남산을 오르지 않는다고 하듯이 나 역시 금굴산 자락 밑에 살지만 오늘처럼 일주를 하기란 쉽지가 않다. 아내는 아우에게 이것저것을 챙겨서 차에 실어 주었다.
“형수님 고마워요. 여기 오면 꼭 큰 집에 온 것 같다니까요.”
아우는 오후 5시경에 금가락지를 떠났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열심히 살아가는 그를 보면 가슴이 뿌듯해진다. 아우가 집을 떠난 뒤 나는 응규와 함께 토마토와 상추를 심을 텃밭을 마지막으로 손질을 해서 이랑을 만들다 보니 어느 덧 태양이 금굴산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산을 뒷 배경으로 하고 임진강이 흐르는 금가락지는 아무리 보아도 천혜의 명당 터라는 생각이 든다. 아우와의 귀한 인연으로 이런 집터에서 살 수 있는 인연을 갖게 된 나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노년에 찾아 온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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