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절날 올린 약혼식, 왜 아무도 안 믿는 거야
약혼식 예물로 빨간 장미꽃과 노란 장미꽃을 심었다
▲ 4월 1일 만우절날, 약혼식 예물로 아내의 시골 화단에 빨간 장미꽃과 노란 장미꽃 두 그루를 심었다.
"엄형, 오늘 내가 약혼식을 올리는 날인데… 오전에 잠깐 나가서 약혼식을 치르고 오후에 다시 들어 올 테니 엄형만 알고 있게나."
"하하, 최형, 시방 누굴 놀리는 거요. 오늘이 만우절이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요."
"아니야, 참말이라니까."
"아무리 참말이라고 해도 행여 내가 속을 줄 아나?"
"허허, 하여간 오후 좀 늦게 들어 올 테니 대신 내 자리나 좀 잘 봐 주시게나."
"아, 글쎄 알았다니까. 염려 붙들어 매고 볼일이 있으면 일이나 보고 오시게나."
나는 내 옆 자리에서 함께 일을 하고 있는 엄형에게만 말을 하고 살짝 자리를 떴다. 그러나 그는 내가 약혼식을 치른다는 말을 도대체 믿어주지를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날이 만우절이었기 때문이다. 만우절 날 뜬금없이 내가 약혼식을 치른다고 하니 괜히 자기를 놀리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 나라고 해도 엄형이 약혼식을 치른다고 하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엄형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다른 동요직원들도 그저 빙그시 웃을뿐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목포시 외곽의 화훼 농장에서 빨간 장미와 노란 장미꽃 묘목 두 그루를 샀다. 우리는 약혼 예물로 정희씨의 화단에 장미꽃을 심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는 장미꽃 묘목을 뿌리에서 흙이 떨어지지 않도록 신문지로 여러 겹 두르고 묶어서 비닐봉지에 소중하게 싸들고 정희씨의 시골집이 있는 일로면 평정리 마을로 향했다. 정희씨가 살고 있는 평정 마을은 무안군 회산 백련단지에서 가까운 시골로 목포에서 자동차로 30여분 정도 소요된다.
아무도 믿지 않는, 만우절날 한 약혼식
봄볕이 화사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장미꽃을 심으면 아주 잘 자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내의 집에 도착하니 벌써 양가 가족과 친척들이 와 있었다. 안방에 음식과 술상을 차려놓고 정희씨의 어머니가 촛불에 불을 붙였다. 마을 사람들이 문틈으로 들여다보며 킥킥거렸다. 정희씨는 부끄러운 듯 시종 고개를 다소곳이 수그리고 있었다.
▲ 약혼식날 풍경. 장모님이 촛불에 점화를 하고 나의 약혼녀인 정희 씨는 부끄러운 듯 시종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사람들이 문틈으로 들여다 보며 킥킥거렸다.
우리는 양가 어르신들에게 절을 하고 술을 따랐다. 정희씨가 나에게도 술을 한 잔 따라 주었다. 어르신들이 시키는 대로 나는 술을 받아 마셨다. 약혼식은 조촐하지만 매우 경건하게 진행되었다.
안방에서 간소하게 약혼식 의례를 치르고 우리는 정희씨가 가꾸고 있는 작은 정원에 장미꽃 두 그루를 심었다. 내가 삽질을 하여 구덩이를 파면, 정희씨가 아주 정성스럽게 흙을 덮으며 다졌다.
빨간 장미는 '열정적인 사랑'이라는 꽃말이 있고, 노란 장미는 '변치 않는 사랑'이란 꽃말이 있어서 택한 나무였는데, 빨간 장미는 나를, 그리고 노란 장미는 정희씨를 상징하는 꽃으로 정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상징하는 장미꽃 두 그루를 심으며 검소하게 약혼식을 치렀다.
▲ 아내의 시골 집 화단에서 내가 삽질을 하자
아내가 정성스럽게 빨간 장미와 노란 장미를 심었다.
약혼식을 치르고 나서 늦은 오후에 나는 다시 직장으로 출근을 했다.
"엄형, 늦어서 미안하우. 별일 없었소?"
"미안하긴, 아무 일 없었어요."
"덕분에 약혼식을 잘 치렀어요."
"허허, 최형, 여전히 날 놀리려는 모양인데 난 절대로 안 속아."
"하하, 믿지 않아도 별 수 없지. 하여튼 업무가 끝나면 내가 약혼식 기념으로 한 턱 쏠 테니 그리 아시오."
"대포? 그거야 좋지."
당시 엄형과 나는 정종대포를 좋아했다. 그 날 업무가 끝나고 엄형에게 나는 정종대포를 한 잔 샀다. 따끈한 정종 대포를 마시며 나는 약혼식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엄형, 정말이야. 나 오늘 약혼 했어."
"허허, 최형 끝까지 날 놀리려는 거요? 그럼 약혼식을 했다는 무슨 증거라도 있나? 뭐, 약혼반지라든지."
"약혼반지 같은 건 없고, 우린 약혼예물 대신 정희씨의 화단에 장미꽃으로 약혼 기념식수를 했어요."
"크크, 그거 봐. 그게 바로 최형이 나한 테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야. 약혼 예물로 장미꽃을 심다니 삼척동자라도 믿지 않겠는 걸. 크크."
"정말이라니까. 정 믿기지 않으면 오늘 밤에 나하고 정희씨의 집으로 가서 우리가 심은 장미꽃을 확인 볼까?"
"좋아. 못 갈 것도 없지. 그 대신 거짓말이라면 어떡할 거요."
"엄형이 하라는 대로 하지 뭐. 만약 사실이라면 엄형은 나 한 테 뭘 해줄 거야?"
"뭐, 대포 한잔 멋지게 사지."
"그럼 지금 정희씨의 정원에 심은 장미꽃 나무를 확인하러 가 보자고."
약혼 예물로 정한 건, 장미꽃 나무 두 그루
엄형과 나는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다 보니 꽤 취해버렸다. 술김에 뭘 못할까? 남자들은 술을 마시면 없던 용기(좋게 말하면 용기이지만, 이건 객기다)를 낸다. 그날도 그랬다. 우리는 술김에 정희씨의 집까지 가고 말았다. 밤하늘엔 달빛이 교교하게 비추이고 있었다. 대문 앞에 들어서니 백구가 컹컹 짖어댔다.
밖이 소란해지자 집 안에서 정희씨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우리 두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오늘 약혼식을 치른 사람이 밤중에 갑자기 들이닥치니 그럴 수밖에. 정희씨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이고, 어쩐 일이세요? 이 밤중에…."
"허허, 그렇게 되었어요. 미안해요. 이 분은 내 직장 동료 엄달포씨라 하오."
"처음 뵙겠습니다. 엄달포입니다."
"네에..."
"자, 엄형 여길 보라고. 이 장미꽃이 오늘 우리들이 심은 약혼 예물이오."
"어? 정말이네!"
"이젠 인정하겠나?"
밖이 소란해지자 장모님과 장인어른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셨다.
"장인어른, 밤늦게 죄송합니다."
"아니, 밖에 있지 말고 어서들 안으로 들어와요."
장모님의 재촉에 우린 안방으로 들어가 장인어른께 넙죽 절을 했다.
"장인어른 정말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만우절 날에 내가 약혼식을 했다는 말을 믿지 않아 술김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어르신, 정말 죄송합니다."
엄형과 나는 죄인이라도 된 듯 장인어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편하게들 앉아요. 남자들이란 그럴 수도 있지. 여보, 뭘 해 어서 술상을 차리지 않고."
"아아… 아닙니다. 이제 이 친구에게 확인을 시켜 주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왔으니 그냥 보낼 수 있나. 술이라도 한 잔 하고 가야지."
장인어른이 만류하며 붙드는 바람에 우린 야밤중에 장인어른과 함께 술을 한잔씩 마셨다. 만우절 날에 약혼식을 하는 바람에 벌어진 에피소드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다.
이제 며칠이 지나면 곧 만우절이 다가온다. 이번 만우절은 아내와 내가 약혼을 한 지 벌써 마흔 세 번째 해가 되는 날이다. 해마다 만우절이 다가 오면, 아내와 나는 우리가 약혼예물로 심었던 장미꽃나무와 약혼식날 밤에 일어났던 소동을 떠올리며 고소를 금치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