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김장배추의 맛!
포성 소리에 놀란 김장배추 수확
11월 13일, 하루 종일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추적 추적 추적……. 정말이지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오늘 내리는 가을비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김장배추를 뽑았다. 배추를 뽑다 보니 겉잎 절반은 벌레들이 먹어치워 속잎 절반만 솎아서 잘라내야 했다. 그래도 고맙기만 하다. 농약을 일체 치지 않은 배추가 아닌가?
이번 김장배추는 아주 특별한 사연이 깃들어 있어 애착이 더 간다, 아내와 나는 지난여름(8월 20일) 소낙비를 맞으면 텃밭에 김장배추를 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펑펑펑펑펑~삐융삐융삐융~ 고막이 찢어나갈 듯한 포성소리가 들렸다. 난생 그렇게 큰 포성 소리를 처음 들었다.
나중에 뉴스를 보니 그 포성소리는 우리 측 군이 북으로 쏘아올린 포성이라고 했다. 북한의 목함지뢰 사건, 우리군의 확성기를 통한 대북방송, 북한의 고사포와 직사포 도발, 그리고 우리군의 포 대응... 북으로 쏘아 올린 바로 이 포성 소리를 들으며 우린 김장배추를 심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근처의 모 포부대에서 쏘아올린 탓에 포성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린 것이다.
정말이지, 그 당시에는 일촉즉발의 준 전시상태였다. 삼팔선 이북 넘어 연천군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전국의 지인들로부터 빨리 대피를 하지 않고 무얼 하고 있느냐고 전화가 빗발쳤다. 그러나 아내와 나는 김장배추를 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내년 1년 동안 먹을 김장 배추는 심어야지요."
"아니, 무섭지 않으세요?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데."
"전쟁이 일어나면 대도시가 더 위험해요. 현대는 공중전이라 경제성이 없는 이곳 연천보다는 서울이나 대도시로 포탄이 날아가지 않겠어요. 호호."
"허긴 그렇기도 해요."
그 당시 우리 집에는 서울에서 친구 C의 가족이 방문을 하고 있었다. C부부와 딸, 오전에 김장배추를 심다가 손녀 가족이 방문하여 그들과 함께 군남홍수조절지 인근 매운탕 집에서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배추를 심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포성소리가 들린 것이다.
"어이, 친구야, 자네는 딸과 손녀를 데리고 어서 서울로 가게나. 만약 여기에 불발탄이라도 떨어지면 두고두고 탓을 들을 게 아닌가? 하하."
"하하, 그렇기도 하군. 허지만 별일 없지 않겠는가?"
"아닐세. 자네와 나는 살만큼 살았지만 자네 딸과 손녀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구만리 아닌가. 그러니 어여 아이들 데리고 서울로 가게나. 여기 토종닭은 집에 가서 끓어 먹게나."
"허허, 그럼 그럴까?"
사실은 야생 토종닭을 사와 가마솥에 끓여서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나는 친구 차에 토종닭을 실어주고 빨리 떠나라고 재촉을 했다. 친구 부부는 겸연쩍은 표현을 지으며 딸과 손녀를 태우고 총총히 사라져갔다.
친구가 떠나간 후 아내와 나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 다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던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 김장배추를 정성스럽게 심었다. 배추를 심은 뒤에는 물을 천천히 주고, 강선활대로 미니하우스를 만들어 그 위에 한랭사를 씌웠다. 한랭사를 씌우지 않으면 배추벌레들의 천국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절반은 벌레들이 먹고, 절반만 남은 무공해 배추
그렇게… 올해의 김장배추는 북으로 날아가는 포성소리를 들르며 심은 아주 특별한 배추다. 그 여린 모종들은 한여름 더위를 이겨내고, 배추벌레들을 비롯하여 각종 벌레들의 끈질긴 공격을 견뎌냈다. 지독한 가뭄도 극복을 했다.
절반은 벌레가 먹고 절반만 건진 배추라 할지라도 이렇게 우역곡절을 거치며 자란 배추를 수확하는 감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다. 비록 배추 포기는 작지만 농약을 일체 치지 않은 싱싱한 무공해 배추가 아닌가! 절반으 성공이라도 좋다.
마침 친구 응규부부가 와서 김장을 하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그와 나는 4년 동안 함께 키운 배추로 김장을 하고 있다. 김장은 1년 동안 두고두고 먹을 가장 중요한 반찬이다. 허지만 주부들에게는 1년 중 가장 힘들고 버거운 작업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김장이란 아내 혼자 하는 일이 아니란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함께 해야 한다. 이웃이 함께 어울려 품앗이 하듯 함께 한다면 김장은 수월하고 재미도 있다.
김장은 아내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다!
친구와 나는 배추를 뽑아서 나르고, 친구의 아내는 그 배추를 다듬어 절반씩 자르는 작업을 했다. 그 동안 아내는 부엌에서 김장에 쓸 양념을 준비했다. 소금과 새우젓은 지난 번 심장이식환자들 모임 때 곰소에서 사왔다. 고춧가루는 구례 혜경이 엄마한테서 구입했다. 나머지 래시피인 무, 마늘, 파, 당근 등은 내가 손수 농사를 지은 것으로 사용을 했다. 찹쌀을 물에 담군 후 진상면 서울 방앗간에서 빻아왔다. 김장 재료와 양념 준비 끝!
이렇게 양념 재료를 준비해 놓고 뽑아온 배추를 소금에 절여 재웠다. 아내와 친구 부인은 밤늦게까지 파, 당근, 무채를 썰어 양념을 준비했다. 무채를 써는 동안 나는 마늘을 다지고, 응규는 생강 껍질 벗겼다.
"자네 생강 껍질 벗기는 손놀림이 수준급이야."
"크크크. 이건 내가 좋아하는 일일세."
"크크크. 난 그런 일 참 못해."
"못한다고 하지 말고 당신도 배워요."
"끝까지 못한다고 우기게나. 크크크."
"ㅋㅋㅋ. 잘 할 수 있는 일이나 잘 해야지. 잘못한 일을 하다간 다치거든."
"아이고, 저 양반은 참 어쩔 수 없다니깐."
"하하, 그래서 응규는 아줌마들이 쓸 만한 남자라고들 하지 않나."
"못쓰면 끈을 달아서라도 써야지요."
그렇게 농담을 하며 김장재료를 준비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생강 껍질을 벗기고 마늘을 다진 뒤 친구와 나는 뒤 바둑을 몇 판 두었다. 아내들이 무채 등을 다 썰어 양념을 준비하는 시간 동안 바둑이라도 두며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 아닌가?
바둑은 정신을 집중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딱딱딱… 똑똑… 무채를 써는 도마소리와 바둑판에 돌을 놓는 소리가 적막한 밤에 멋진 드럼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김장에 쓰일 양념재료를 만들고 나자 자정이 훌쩍 넘었다.
함께 김장을 담그면 피곤하지 않고 맛도 더 특별해...
다음날 새벽 5시 밖에 나가 보니 어젯밤 재워두었던 배추가 숨이 죽어 곱게 가라 앉아 있었다. 너무 오래 재워두면 김장이 짜진다. 새벽잠을 설치고 우리는 절인 배추를 하나하나 씻어 냈다. 두 번, 세 번 씻어내자 간이 적당하게 맞아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씻은 배추로 차곡차곡 쌓아올려 물 끼가 쏙 빠지도록 했다.
쌓아올린 김장배추 너머로 동이 트고 있었다. 임진강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며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했다. 아침 안개 속에 절인 배추들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김치가 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식사를 하고 나니 오전 9시, 절인 배추의 물 끼가 충분히 빠지자, 찹쌀로 풀을 쓰고, 양념을 골고루 버무려 만들었다.
김장을 버무리는 것은 내 친구 응규가 선수다. 그는 배추를 버무려 비비는 시범을 보여 주며 "김치는 요렇게 비비는 거요."하며 씩 웃었다. 그가 들고 있는 김치를 보자 군침이 꿀꺽~ 넘어갔다.
"자넨 역시 쓸 만한 남자야. 크크크."
"당신도 좀 쓸 만한 남자가 되어 보세요."
"난 잔 심부름이나 하는 남자라오."
"그것도 참 쓸 만해요. 호호호."
"오늘 점심에 새 김치로 밥을 먹을 생각을 하니 저저로 군침이 넘어가네!"
"쌀밥에 김치를 북북 찢어 둘둘 말아 한 잎 오물오물 먹는 맛이란 기가 막히지……."
잘 비벼진 김치를 김장독에 차곡차곡 담겨졌다. 집 뒤꼍에 땅을 파서 김장독을 묻어 두었다. 김장독 위에는 짚으로 움막을 지어 그늘이 지도록 했다. 말하자면 천연 냉장고를 만들어 놓은 샘이다. 눈이 폭폭 내리는 한 겨울에 김장독에서 잘 숙성된 김치를 꺼내 먹는 맛이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맛이다. 서울아이들이 먹을 김치는 김치용기에 담았다.
"어이 쓸 만한 남자. 눈이 폭폭 내리는 날엔 금가락지로 오시게. 저 김장독에서 김치를 꺼내 돼지고기 몇 점 넣고 김치찌개를 푹푹 끓여 소주를 한 잔 하면, 크으으~ 맛이 기가 막힐테네께롱."
"하믄하믄, 오고말고. 이거야 정말 생각만 해도 군침이 막 도네.
김치를 비비고 담는 작업은 딱 12시에 끝이 났다. 김장을 마무리하자 이를 축하라도 해 주듯 한 떼의 기러기들이 'V'자를 그으며 지붕위로 끼룩끼룩 노래를 부르며 날아갔다.
"오우, 기러기들이 김장을 축하해 주네요."
"하아, 고 녀석들 사이도 참 좋아 보이네."
"그러게요. 기러기 아빠란 말은 틀린 말 같아요."
"기러기는 일부일처로 평생을 살아간답니다."
"어머, 그래요?"
"암수 한 쪽이 먼저 죽으면 짝 잃은 기러기는 평생을 먼저 죽은 친구를 그리워하면서 혼자 살아간다고 해요."
"원앙에 따로 없네요. 기러기야 고맙다!"
김치를 땅 속 천연 냉장고 김칫독에 가득 넣어 묻어놓고 나니 아주 아주 부자가 된 기분이다. 이제 쌀만 있으면 금년 겨울은 무난히 나지 않겠는가? 친구 부부와 함께 새로 담근 김치를 식탁에 올려놓고 점심을 먹었다. 김치 맛이 입에 살살 녹는다. 북으로 날아가는 포성 소리를 들으며 자란 귀한 배추여서 그런지 아주 특별한 맛이 나는 것 같다.
"원앙새가 따로 있겠는가? 김장을 하고 이렇게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원앙일세."
"그게 정답이군. 크크."
"쓸 만하다 남자 분들. 여기 금년에 담근 매실주도 한 잔 하시지요. 호호호."
"하하, 그럼 나도 이제 쓸 만하다 남자인가?"
"끈을 달아 놓으니 쓸 만하네요. 호호호."
"하하하."
"크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