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김장을 담그며...
그대가 언제나 만족해 있다면
그때는 설령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도둑맞는다 해도
스스로를 가장 큰 부자로 여기리라.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른다면
아무리 부자일지라도
그대는 그 돈의 노예일 뿐이다.
-나가르주나
금년에는 뒤늦은 김장을 했다. 아내가 병원에 한 달 동안 입원을 하는 바람에 심어 놓은 김장배추도 제대로 돌보지 못해 벌레들에게 거의 보시를 하여 남는 것이 없다. 벌레들이 먹어치운 겉잎을 자르고 나니 겨우 속잎만 몇 장 남았다. 그도 고맙게 생각을 해야지. 몇 장 안 남은 배추를 지난 11월 24일 날 무서리가 내리던 날 홀로 잠시 와 수확을 해서 땅속 김장독에 묻어 두었다.
아내는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김장을 걱정했다. 면역이 약한 아내는 감기몸살을 앓더니 급기야 폐렴으로 진전하여 꽤나 오랫동안 입원을 해 있어야 했다. 심장을 이식한 아내는 매일 면역 억제제를 복용한다. 그래서 면역이 어린아이 수준이다. 조금만 무리를 해도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 한 달 동안 입원했던 아내는 아직 완전히 회복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 퇴원을 했다.
아내는 퇴원을 하자말자 김장을 해야 한다며 서둘렀다. 그런 아내를 나는 말렸다. 김장을 못하면 사서 먹으면 될 거 아니냐고. 그러나 주부들의 마음은 다르다. 김장을 해야만 연중 먹을 반찬을 마련하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김장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는 친구 응규가 날만 받으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12월 6일 자로 김장날짜를 잡고, 친구와 둘째 경이랑 함께 연천 금가락지로 왔다. 경이는 몸이 성치 않는 엄마를 오지 말라고 극구 말리다가 결국 함께 왔다.
“엄마는 거실에 그냥 가만히 계세요. 시킬 일이 있으면 지시만 하시고요.”
“경이 말이 맞아요. 당신은 가만히 앉아서 지시만 내리면 되요.”
아내는 아직도 기침을 심하게 하고 그럴 대마다 가래가 끓고 있다. 폐렴이 아직 완전하게 낫지 않는 것이다.
연천에 오기전날 아내와 나는 구리 농수산물시장에 가서 김장배추 12포기를 샀다. 내가 키운 텃밭에는 벌레가 다 먹어버리고 겨우 속 꽁지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배추만으로는 김장이 턱없이 부족하다. 나는 절임배추를 사자고 했지만 아내는 절임배추 사는 것을 강력히 거부했다. 적어도 김장만큼은 직접 자기 손으로 절여서 담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내의 완고한 고집에 꺾여 생 배추를 사야만 했다.
파, 갓, 새우 등 김장에 필요한 양념도 샀다. 고춧가루, 마늘, 당근 등은 내가 손수 지은 농사로, 그리고 소금은 부안 곰소에서 염전을 하시는 신종만 사장님이 금년에도 한 가마를 보내주어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
오랜만에 금가락지에 온 아내는 감개가 무량한 모양이다. 텃밭과 정원을 일일이 살펴보고, 화분의 화초를 보더니, “세상에! 빨리 들여 놓고 물을 주어야겠어요. 저 블루베리도 들여놓고요.” 물을 제대로 주지 못한 화초들이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다 영하의 날씨에 문주란, 물옥잠, 수련 등은 얼어서 잎이 심히 쪼그라들어 죽어버린 것 같았다.
화초들 월동준비 먼저...
아내는 그 일부터 먼저 하자고 했다. 아내는 화초들이 시들거나 죽어 가면 가장 질색을 한다. 살아있는 생명은 다 똑 같다는 것이다. 하긴 아내의 말이 맞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살아 있는 것들의 생명은 다 소중하다.
아내의 지시(?)에 따라 화분들을 거실에 들여놓기 시작했다. 화분이 거의 거실 한쪽을 다 차지했다. 해마다 화분들이 늘어나고 있어, 겨울이 되면 금가락지 식구들은 매년 늘어나고 있다. 바닥에 거적을 깔고, 그 위에 화분 받침대를 놓고, 받침대 위에 화분들을 조심스럽게 옮겨 놓았다.
그리고 물을 아주 천천히 주기 시작했다. 너무 급하게 주거나 많이 물이 주면 바닥으로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겨울철에 실내에서 물을 주는 작업은 참으로 어려운 수행 중의 하나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적당하게 주어야만 물이 흘러내리지 않는다. 작년에는 페트병에 작은 구멍을 뚫어서 거꾸로 매달아 놓기도 했다. 그러면 물이 한 방울씩 떨어져내려 조금씩 적셔주기 때문에 물이 바닥으로 흘러내릴 염려도 없고, 또 화초들에게도 목을 축여 주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아이고, 주인님 감사합니다. 그동안 목이 타고 추워서 곧 죽는 줄로만 알았어요!”
“그래 미안하구나. 이제 안심하려무나.”
거실로 들어와 생명의 물을 먹은 화초들이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정말 그동안 얼마나 목이 타고 추었을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할 화초는 키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농사도 마찬가지다. 특히 금년에는 여러 가지 피치 못할 일들이 많아 집을 비우다 보니 채소밭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농작물은 날마다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는데, 허구한 날 집을 비웠으니 제대로 자랄 수 있겠는가? 그 결과 김장배추, 양배추, 무 등 금년 가을 농사는 완전히 꽝이다.
내가 물을 주는 사이에 친구는 밖에서 배추를 소금에 절이는 작업을 했다. 화분에 물을 주고 밖으로 나가니 그는 열심히 배추에 소금을 뿌리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남의 일을 내일처럼 해주는 친구다. 밖은 얼음이 얼고 춥다. 이곳 연천은 겨울엔 평양보다 춥고, 여름엔 평양보다 덥다. 내륙인데다 임진강이 흘러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철원과 비슷한 날씨를 보여주는 곳이 연천이다.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김장문화'
추운 날씨에 손을 호호 불어가며 배추를 절여주는 친구가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어제 나는 아내에게 절임배추를 사라고 강요를 했다. 배추를 절이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추 포기마다 잎을 일일이 젖혀가며 소금을 뿌리고, 절여두었다가 일일이 씻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다. 배추 속을 씻고, 다듬고, 절이고, 헹구고, 버무리다보면 하루가 꼬박 걸린다. 김장을 하고나면 주부들은 김장 후유증으로 시달린다.
한국의 ‘김장문화’는 이제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게 모두 연중행사로 김장을 담그는 주부들의 정성 덕이 아닐까?
지난 2013년 2월 미셸 오바마 영부인이 백악관 정원에서 직접 기른 배추로 김치를 담가 SNS에 올려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같은 해 12월 한국의 ‘김장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는 한국의 김장문화를 선정한 이유를 이렇게 언급했다.
“하나는 이웃과 담가 나눠 먹는 공동체 정신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재료를 창의적으로 이용하는 식습관이다.”
한 나라의 음식문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는 것은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드문 일이다. 무엇보다도 유구한 세월 동안 우리 조상들이 이웃과 함께 품앗이를 하며 담가온 김장문화를 대물림을 하며 슬기롭게 전수해온 덕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여기에는 1년 동안 먹을 영양반찬을 준비하는 주부들의 수고로움과 노력이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주부를 뺨치는 친구의 김장솜씨
그런데 내 친구 응규는 주부를 뺨치는 김장솜씨를 가지고 있다. 다듬고, 씻고, 저리고, 비비는 솜씨가 탁월하다. 오죽했으면 아랫집 현이 할머니가 그를 “꽤 쓸 만한 남자라고 했을까?” 그는 농사일에서부터 김장, 마늘 까기, 생강 깎기, 김치찌개 끓이는 솜씨까지 주부가 할 일을 거의 다 노련하게 해낸다. 특히 그의 김장솜씨는 거의 달인에 가깝다. 나는 김장의 달인 친구로부터 김장 절이는 방법을 배워 그를 거들었다.
사실 김장을 절이는 일은 처음 해본다. 먼저 소금물을 적당히 녹여 배추를 담그고, 소금이 베어드는 적절한 시간이 지나면 배추를 건져내며 포기사이사이로 소금을 뿌려 차곡차곡 쌓아둔다. 이때 소금이 배추 속까지 골고루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 소금이 베어드는 시간을 잘 맞춰 절인 배추를 다시 씻어낸다. 친구는 무려 세 번이나 절인배추를 찬물에 씻어냈다. 손이 저리도록 시립지만 참고 씻어낸다.
씻어낸 배추를 물이 잘 빠지도록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영하의 날씨라 조금만 오래 두면 얼어버렸다. 그래서 쌓아둔 배추가 물이 거의 다 빠질 무렵 다용도실로 옮겨두었다. 그 다음에는 거실로 옮겨 양념과 버무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 절인 배추를 다용도 실로 옮기고, 뜰의 가마솥에 불을 지펴 찹쌀죽을 쑤었다.
아궁이에 불을 적당히 지피고, 주걱으로 끓는 죽을 부지런히 저어주어야 죽이 눌지 않는다. 친구와 나는 아궁이에서 치솟는 연기에 눈물을 훔치며 찹쌀죽을 교대로 열심히 저었다. 죽을 잘 저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물이 너무 적어도, 불을 너무 싸게 지펴도, 죽이 늘어 붙거나 되게 쑤어진다. 내가 불을 너무 세게 지피는 바람에 죽이 되게 쑤어져 결국 뜨거운 물을 부어넣고 다시 끓이는 사태가 발생했다.
무채와 당근 채를 써는 일은 둘째 경이가 맡아서 했다. 경이는 완전한 채식주의자다. 새우는 물론 파, 마늘,부추, 달래 등 오신채도 일체 먹지 않는다. 그래서 양념을 두 군데로 나누어 버무려야 한다.
물론 양념을 절인배추에 버무리는 일도 친구가 했다. 그는 일일이 배추 속을 떠들어보며 양념을 골고루 버무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진지하던지, 김장을 버무리는 모습이 사뭇 삼매경에 젖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김장을 담그는 일이 밤 12경에야 끝났다. 버무린 김치는 김장 그릇에 차곡차곡 쟁여 넣었다. 작년까지는 뒤꼍 김장독에 묻어 두었는데, 금년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아내가 건강이 좋지 않아 겨울철에는 주로 남양주 아이들과 함께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웃과 함께 담가 나눠먹는 우리조상들의 김장문화 정신을 이어 받아야...
다음날 아침에는 새로 담근 김치로 아침식사를 했다. 그리고 담근 김장을 자동차의 트렁크에 보물 상자처럼 차곡차곡 실었다. 우리가 1년 동안 반찬이 아닌가! 우리 집 월동준비는 이렇게 완성이 되었다. 자동차에 김장배추를 싣고 남양주로 출발했다. 세상에 부자가 부럽지 않다. 사실 쌀과 김치만 있으면 먹을거리로 겨울을 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는 일. 마음이 평화롭고 훈훈하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가진 것에 만족을 한다면, 쓸데없는 것들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무엇을 많이 가지려는 행위에 따르는 어려움과 그것을 얻지 못하는 실망이라는 괴로움은 나를 어려운 경지로 몰고 갈 것이 틀림없다. 작은 욕망에는 곧 만족이 뒤따른다. 이 두 가지 성품이 없으면 경쟁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인도의 성자 나가르주나(Nagarjuna龍樹菩薩:150~250? 대승불교의 사상적 기반을 확립한 제2의 붓다)는 그의 ‘다정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언제나 만족해 있다면
그때는 설령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도둑맞는다 해도
스스로를 가장 큰 부자로 여기리라.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른다면
아무리 부자일지라도
그대는 그 돈의 노예일 뿐이다.
부처님 당시에 한 상인이 있었다. 그는 외국에 장사를 하러 갔다가 돌아오면서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주려고 굉장히 귀하고 값진 물건을 가지고 왔다. 그는 귀국하자 그것을 임금님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상인은 임금님에게 말하기를, “임금님은 물질적으로 최고의 부자이지만,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에 가장 가난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하고.
그러므로 임금님처럼 엄청난 부자이면서도 만족한 줄 모른다면, 아무리 부자가 된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무의미한 일이다.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옷을 열 겹으로 껴입을 수도 없고, 아무리 진기하고 맛있는 음식일지라도 하루에 열 번 씩 밥을 먹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임금이든지 거지든지 배고픔과 목마름을 만족시킬 만큼 밖에는 먹지 못하며, 몸을 보호하기에 충분한 만큼의 옷만 필요할 뿐이다.
오늘, 대통령을 탄핵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도 대통령은 임금님처럼 최고의 부자이면사서도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과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적게 바라고, 작은 것에 만족하며 친절한 행위로써 받은 것을 되갚아 줄줄 아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부자로 사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가 한국의 김장문화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한 이유, 즉 우리선조들의 “이웃과 담가 나눠먹는 공동체 정신”을 깊이 새겨 넣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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