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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타 무덤에서-거룩한 악녀이자 천한 성녀 에비타

찰라777 2007. 8. 13. 10:37
'거룩한 악녀이자 천한 성녀 에비타'

레콜레타 에비타의 무덤에서

 

 

 

 

 

레콜레타 공동묘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땅값이 비싸고 고급스런 주택가가 몰려있는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공동묘지 입구에 도착을 하니 이건 마치 박물관이나 조각공원을 연상케 한다. 우리는 도둑고양이 들이 활개를 치는 대부호의 저택 같은 거대한 묘원으로 들어갔다.

 

전혀 묘지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수려한 조각과 전통적인 장식으로 치장된 납골당은 하나하나가 예술품 그대로다. 레콜레타 묘지에는 6400여개의 납골당이 있는데, 그 중에 70개가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 있을 정도다. 이곳은 천국으로 떠나는 자들의 최고급주택지인가? 이 묘지에는 13명의 역대 대통령 묘소와 저명인사들의 무덤이 있다. 아마 멋진 탱고를 추다가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리라.

 

그러나 우리가 레콜레타 공동묘지를 찾아간 것은 순전히 에비타의 무덤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수십 개의 화려한 납골 탑을 지나 다소 구석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에비타의 묘소는 생전에 화려함과는 달리 작고 초라하다. 레콜레타의 다른 명망가들이나 부호들의 묘에 비해 에비타의 묘소는 조각이나 장식 같은 것도 없다.

 

"그녀의 명성에 비해서는 너무 초라하군요."

"그래도 그녀가 죽은 지 24년 후에야 이곳에 묻힐 수 겨우 있었다는 군."

 

 

사생아로 태어나 퍼스트레이디가 된 에비타

 

내가 처음 에비타를 알게 된 것은 80년대 초에 뉴욕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뉴욕의 타임스퀘어 광장에 있는 한 오페라 극장에서 뮤지컬 '에비타'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군부의 칼이 시퍼렇게 판을 치고 있던 때라 우리나라에서 이런 뮤지컬이 상영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가 페론이 에비타를 만나 민주 세력에 의해 실각하기가지의 파란 만장한 에비타의 생애를 그린 작풍이었기 때문.

 

에바 두아르테는 1919년 5월 19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50마일 덜어진 팜파스의 시골마을에서 농장 요리사였던 어머니와 농장주인 사이에서 네 번째 사생아로 태어났다. 에바의 아버지 두아르테가 죽자 사생아라는 이유로 장례식 참석까지 거절당한 그녀. 에바는 본처 가족들과 중산층 계급에 대한 반감을 품고, 탱고 가수 오거스틴 마갈디를 만나 그와 함께 부아 명성을 좇아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무작정 향한다. 그녀의 나이 15세.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그녀의 생활은 고향에서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었다. 그녀는 하루하루의 끼니를 해결하기 위하여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하여 길거리에서 몸을 파는 창녀에서부터 무명의 단역 배우에 이르기까지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별처럼 많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 24세 때인 1943년, 그녀는 육군 대령인 후안 페론을 만나게 된다. 그 때는 이미 미모와 야심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페론이 대통령에 당선이 되자 그녀는 마침내 영부인의 자리에 오른다. 이는 마치 6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군부가 권력을 잡은 환경과 비슷하다.

 

그녀는 성녀와 악녀라는 이중자대 사이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떨치며 서방세계 사교계의 꽃으로 군림한다. 그녀는 퍼스트레이디로서의 국민의 선망 대상에 그치지 않고 정계의 2인자 자리에 오르려고 시도하다가 군부와의 마찰로 실패한다. 이에 그녀는 정부의 주요 요직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정적을 비밀리에 체포·고문하고 사라지게 만들기도 했다.

 

 

'거룩한 악녀이자 천한 성녀'가 된 에비타

 

그녀는 가진 자에게는 표독한 퍼스트레이디였지만, 노동자, 빈민계를 마취시킨 악녀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에비타는 가지지 못한 자에게는 따뜻한 어머니였다. 이는 사생아로 태어난 기구한 운명과 살아온 인생역경이 그녀의 가슴에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1952년 7월 26일, 에비타는 척수백혈병과 자궁암으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한다. 그녀의 나이 겨우 33세. 스페인 출신의 페드로 아라 박사는 에비타의 시신을 '영원히 부패하지 않는 미이라'로 만든다. 에비타가 죽은 후 한 달 동안 국가적 애도 기간이 선포 되었고, 오락, 상점 등이 3일간 문을 닫았다.

 

 

죽은 후에도 계속되는 에비타의 신화

 

에비타가 떠나난 이후 페론은 실각과 재선의 혼미한 정정에 휘말러 갔고, 그런 와중에 민중과 정치인들은 '성녀 에비타'의 신화를 이용한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정책을 펴 나간다. 군부의 쿠데타로 실각한 페론이 스페인으로 망명하자, 에비타 신화를 두려한 군부는 에비타의 시신을 이탈리아로 빼돌리는 사건을 저지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페론주의자, 노동자, 여성들이 군부에 압력을 넣어 그녀의 시신을 마드리드에 망명중인 페론에게 넘기도록 했다. 이렇게 사후에도 에비타의 신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1974년 페론이 사망하자 그의 아내 이사벨이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어 에비타의 시신을 대통령 궁으로 옮겨 놓고 자신이 에비타의 계승자임을 인식시키며 포퓰리즘 정책을 펴 나갔으나 이미 그녀는 에비타가 될 수 없었다.

 

이사벨은 결국 또 다른 군부의 쿠데타로 붕괴되고 에비타의 시신은 24년 만에 레콜레타 가족묘역으로 옮겨진다. 죽은 후에도 파란 만장한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는 에비타. 그녀는 이제 레콜레타의 가족묘역이 초라하게 잠들고 있다.

 

"귀족들의 묘역에는 꽃 한 송이도 없고, 찾는 사람들도 없는데, 사생아 에비타의 묘역에만 꽃을 든 사람들이 몰리고 있군요."

 

아무튼 에비타가 세상을 떠나던 날, 아르헨티나에서는 꽃이 품절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가 세상을 떠진 지 한 세기기가 지났는데도 성녀를 추모하는 행렬은 끝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