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섬에도 박물관이 있다. 아후 타하이 유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박물관은 마치 어느 가정집 건물처럼 간소하고 단출하다. '아나 테 파우 동굴'을 돌아보고 해변으로 내려와 우리는 박물관으로 갔다.
돌로 벽을 쌓고 그 위에 갈색의 지붕을 얹은 건물은 박물관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바닷가에 있는 별장 같은 기분이 든다. 지구촌 어디를 가나 박물관에 가는 것은 언제나 먼 고향으로 가는 기분이 든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마치 실내는 우리나라 교외에 흔히 있는 작은 갤러리를 연상케 한다.
작은 전시공간에는 롱고롱고 서판(Ko hau rongo rongo, 상형문자가 새겨진 서판)과 모아이 석상의 눈이, 그리고 사진과 그림 몇 점, 토기 몇 점이 전부다. 사진과 그림은 초창기에 이 섬을 찾았던 항해사들과 선교사들이 남긴 것이며, 토기들은 타하이 유적지에서 발견된 것이다.
△롱고롱고 그림문자가 새겨진 서판
박물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롱고롱고 서판이다. 서판에는 새, 새의 부리, 물고기, 나무, 태양, 식물, 신체의 일부 등이 기이하게 새겨져 있다. 이 상형문자가 해독이 된다면 모아이 석상의 비밀이 풀리지 않을까?
"저게 이상한 새들의 그림이 글씨라이 믿어지지가 않군요."
"라파누이들이 만든 롱고롱고 서판이야."
우리는 이집트에서 신성문자라고 하는 상형문자를 본적이 있지만 이 섬의 글자는 매우 기이하게 생겨서 신비감을 자아내게 한다. 전설에 따르면 호투 마투아 왕이 이스터 섬에 상륙을 할 때에 67개의 문자가 새겨진 이 서판들을 들고 왔다고 한다. 호투 마투아 왕은 이 글자를 읽을 줄 알았다는 것.
△아후 타하이 유적지의 모아이들
서판을 노래처럼 읽을 수 있던 사람들은 전문가들인 '탕가타 롱고롱고' 사도들이었다. 이들은 섬의 구역마다 설치되어 있던 특별학교에서 서판을 쓰고 , 읽는 방법을 배웠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아나케나에 있는 학교였다.
아나케나에서는 1년에 한 번 왕이 주관하는 롱고롱고 서판 암송대회를 개최했는데, 탕가타 롱고롱고들이 직접 서판을 암송하기도 하고,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기도 했는데, 만약 제자들 가운데 하나라도 서판을 도중에 더듬거리기라도 하면 그 서판은 압수당했다는 것.
△유적지 부근에 있는 조형물
롱고롱고 서판은 지금까지 21개의 진본 서판과 한 개의 지팡이 그리고 같은 문자가 들어 있는 세 개의 가슴장식을 포함하여 총 25개의 서판이 존재하고 있다. 이 서판에는 595개의 기본 기호를 포함해서, 총 1만 4천, 21개의 기호가 적혀 있다.
△아나케이 탕가타 동굴에 새겨진 암각화 그림
이 문자는 이스터 섬 곳곳의 바위와 동굴의 암각화로도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스터 섬에 대거 도착한 선교사들이 라파누이들에게 개종을 요구하며 이교도의 우상격인 서판을 불태우게 하여 상당부분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남아있는 서판들도 약탈자들에 의해 지구상 곳곳의 박물관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
공식적으로 롱고롱고 서판이 발견된 것은 1868년 테파노 자우센 주교에 의해서였다. 이스터 섬 주민들은 존경의 증표로 테파노 자우센 주교에게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꼬아 만든 긴 줄을 감은 나무막대기 한 개를 건네주었는데, 선물을 받은 자우센 주교가 줄 안쪽을 살펴보니, 작은 널빤지 상형문자가 가득 씌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최초의 '코하우 롱고롱고'(노래 부르는 사람의 지팡이) 서판이 발견된 순간이었다.
△박물관에서 밖을 내다본 풍경
이보다 먼저 1864년 선교사로 왔던 에젠느 에로 수사는 담당 수도원장에게 보낸 편지에 롱고롱고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섬사람들은 집마다 나무나 막대기로 만든 서판이보입니다. 거기에는 매우 다양한 그림문자들이 새겨져 있고…… 그러나 이 섬의 원주민들은 어떻게 읽는지, 그리고 어떻게 쓰는지 전혀 모릅니다."
서판을 읽는 법은 안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밑으로 읽게 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기호가 각 줄마다 전도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읊는 사람은 각 줄 끝에서 판을 돌려야 한다는 것. 이런 서법은 전 세계적으로 유일한 서판의 판독은 아직까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서판을 해독할만한 족장이나 전문가들이 모두 죽어버려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1862년 페루인들이 섬을 습격하여 이스터 섬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판은 족장이나 귀족, 제사장만 읽을 수 있었는데 권력층의 사람들 모두가 페루의 노예로 끌려갔다는 것.
극적으로 탈출하여 섬으로 돌아온 사람들도 천연두 같은 전염병에 감염되어 모두 죽어버리고 말아 서판을 판독할 수 있는 사람이 씨를 말리게 되었다는 것.
지금까지 수많은 학자와 탐험가들이 글자의 해독을 시도했다. 1886년 윌리엄 톰슨은 이 서판을 읽을 수 있다는 '우레 바에이코'란 83세의 노인을 찾아갔다.
그는 두 개의 서판을 들고 가서 번역해 달라는 교섭을 했다. 그러나 노인은 가톨릭 사제들이 그런 짓을 금지했다며 들으려고 하지를 않았다. 톰슨은 돈과 선물을 보내 유혹을 했지만 노인은 유혹을 피하려고 산으로 은둔해 버렸다. (사진:물고기와 새들이 배열된 그림문자)
그러나 톰슨은 포기하지 않고 노인을 찾아내 술잔을 돌리며 유혹을 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틈을 타 톰슨은 서판들을 촬영한 사진을 슬며시 꺼내 놓았다. 진짜 서판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사진으로 된 서판은 반발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노인은 서판을 유창하게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톰슨은 우레 바에이코 노인이 실제로 그 문자들을 읽어 내려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세를 바꾸는 것이 각 행의 상징들의 수와 일치하지 않았고, 다른 서판의 사진으로 바꾸어도 아무런 변화 없이 같은 이야기가 계속 되었던 것.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거리낌 없이 유창하게 낭송하는 노인의 읽기를 아무도 가로막지 않았다.
노인은 주요 문자의 의미를 확실히 알고 있었고, 그 해석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외국어로 된 책을 실제로 읽지는 못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 완전하게 확신을 하고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처럼…(윌이람 톰슨, '테 피토' 1891 발췌).
1995년 미국의 언어학자 스티븐 피셔는 롱고롱고 목판 구조의 많은 부분을 해독했다고 언명했다. 피셔에게 판독의 실마리를 제공한 '로제타석'은 산티아고 막대기였다. 그는 그림문자로 이루어진 그룹의 맨 앞에는 '남근형태의 접미사'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연장자가 들려준 '영창(詠唱)'과 종교를 바탕으로 막대기에 새겨진 내용이 창조의 노래, 우주 생성과 탄생을 담고 있다고 해독했다.
즉 교미의 전 과정을 표현한 것으로, 세상만물의 탄생을 표현하고 있는데, 세 개가 한 벌로 이루어진 그림문자의 맨 처음 기호는 '교미를 하는 존재', 두 번째 기호는 '교미를 받는 존재', 세 번째는 기호는 '교미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는 것. 피셔가 해석한 롱고롱고의 한 문장은 이렇다!
"모든 새들이 물고기와 교미했다. 그로 인해서 해가 태어났다!"
이 얼마나 멋진 우주 창조의 해석인가!
설사 그 내용이 맞지 않더라도 신선한 충격을 줄만한 재미있는 해석이다.
물고기와 새들이 연달아 나오는 모습, 남근의 형태를 하고 있는 그림들…
그런 신비한 상형문자를 보고 여러가지로 해석을 하는 인간의 상상력의 날개는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허지만 여전히 다른 연구자들은 피셔의 연구를 납득하지 못한 해석이라고 비평을 하다. 서판은 완전하게 해독되지 않은 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실로 인류 역사상 수수께끼로 얼룩진 문명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수수께기로 얼룩진 롱고롱고 서판을 떠나 다하이 유적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