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은 1년 중 가장 큰 주부들의 행사
지난 3일간은 김장을 하느라 무척 바빴습니다. 배추와 무를 뽑아 다듬고, 절여서, 양념을 하고, 버무려서, 마지막으로 땅에 구덩이 4개를 파서 배추김치, 총각김치, 홍당무, 백김치 등 김장독을 차례 묻기까지 정말 숨 돌릴 사이가 없었습니다. 김장은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고 하며 아내는 불편한 몸인데도 3일 동안을 꼬박 김장을 담그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는 최전방 오지인데다 마을과도 3km정도 떨어져 있어 아내와 둘이서 김장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곳으로 이사를 온지 1년밖에 안 된 데다 모두가 가을걷이 때문에 눈코를 뜰 사이 없이 바빠서 누구를 도와줄 틈이 없습니다. 지난 토요일 날 큰 아이가 서울에서 와서 아내의 김장심부름을 도와주고는 있지만 무거운 것을 들거나 밖에서 하는 일은 모두 내가 해낼 수밖에 없습니다.
내 평생에 김장을 하는 일에 관여를 한 것은 사실 이번이 처음입니다. 배추와 무를 뽑는 일, 거실에 옮겨 놓는 일, 시래기를 벗겨 내는 일, 마트에 가서 양념을 사오는 일 등등 허드렛일은 내가 도맡아서 하고, 아내는 간을 치고, 양념을 버무려서 김장을 비비는 일들을 했습니다.
김장을 하는 일이 이렇게 잔손이 많이 가고 큰일이라는 것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김장을 담는 아내를 도우며 우리조상들이 김장을 하는 의미를 새삼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김장'이라는 말은 원래 침장(沈藏)→팀장→딤장→짐장→김장으로 음운이 변하여 생겼다고 합니다.
김치라는 이름도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보면 김치 담그기를 감지(監漬)라고 했고, 1600년대 말엽 요리서인 <주방문(酒方文>에서는 김치를 지히(沈菜)라고 했는데, 그 '지히'가 '팀채→딤채→짐채→김채→김치'로 구개음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전라도 지방에서는 김치를 짐채라고 부르고 있고, 김치냉장고의 이름인 '딤채'도 여기서 유래되었음을 비로써 알게 되었습니다.
김치를 만드는 순서는 절이기(겉잎을 떼고 다듬은 후 밑동에 칼집을 넣어 반으로 쪼갠 후 소금에 절여 물 끼를 빼낸다)→양념(마늘, 생강 껍질을 벗겨 다진 후 고춧가루, 무채, 파, 미나리, 갓, 새우젓 등을 준비한다)→버무리기(양념과 기타 재료를 잘 버무려서 소를 만든다)→속넣기(절여서 건져둔 배추 잎사귀 사이사이에 양념소를 넣는다)→저장하기(김장독에 차곡차곡 넣어 김치냉장고나 땅속 김장독에 묻는다)→무청과 배추 시래기를 엮어 매다는 일 등의 순서를 밟아아만 하는 것도 이번에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말은 쉽습니다. 그런데 마늘 까고, 생강 껍질을 벗겨 곱게 다지고, 무와 쪽파를 다듬어 칼로 송송 썰어 무치는 일, 새우젓, 당근, 고춧가루를 적당히 섞어 버무리는 일… 정말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복잡한 일이 김장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김치를 버무리는 동안 나는 무청과 배추 시래기를 엮어서 응달진 곳에 매달았습니다. 김장을 하는 동안 집 안팎은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큰 그릇에 배추와 무를 여러 번 씻어 물 끼를 빼고, 소금에 절이고, 발 딛을 틈도 없이 여러 가지 양념을 늘어놓은 모습이 마치 요리백화점을 방불케 합니다.
땅속의 천연 김치냉장고 김장독을 묻다
"구덩이를 네 개는 파야 할 것 같아요. 배추, 무, 총각김치, 백김치 항아리를 따로 따로 구분해서 땅이 얼기 전에 묻어야 하거든요."
"힘깨나 서야겠는 걸. 볕 짚과 왕겨도 필요하겠네요. 한겨울에 영하 20~30도 떨어지는 혹한을 견디려면 뚜껑을 덮을 스티로폼과 방한덮개도 있어야 하겠고…"
"이러다간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겠어요."
김장독을 땅에 묻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김장독을 땅에 묻기로 했습니다. 평생을 도시의 아파트에서만 살다가 텃밭이 있는 농촌에서 살고 있으니 전기로 가동하는 김치냉장고 대신 땅속에 자연 김치냉장고를 만들어 저장하는 것이 훨씬 운치가 있고 맛도 있어보일 것 같기 때문입니다. 김치를 땅에 묻으면 한 여름까지 곰삭은 묵은 김장김치를 즐겨 먹을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지요.
부엌에 설치한 김치냉장고가 편리하기는 합니다. 아무 때나 편하게 꺼낼 수가 있고, 요즈음은 김치냉장기술이 발달하여 사계절 김치를 즐길 수 있지요. 그런 편한 김치냉장고를 마다하고 텃밭에 구덩이를 파는 일, 추운 겨울에 손을 호호 불며 김치를 꺼내러 가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허지만 김장독을 묻을 수 있는 땅이 있다 보니 옛날 시골에서 김장독을 땅에 묻어 곰삭은 김치를 꺼내 먹던 향수가 떠올랐습니다. 어린 시절 뒤뜰 응달진 곳에 김장독을 묻던 어머님을 떠올리며 나는 서쪽 텃밭 창고 옆 응달진 곳을 찾아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습니다.
삽질과 곡괭이질을 번갈아 가며 땅을 파내려 가는데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등에도 땀이 흥건히 괴입니다. 영하의 날씨인데도 육체노동은 땀을 흘리게 합니다. 흙을 걷어 올리며 구덩이를 파는 마음은 짙은 향수와 함께 마치 영혼의 안식처를 만드는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구덩이를 파내고 바닥에는 왕겨를 깔았습니다. 마침 집에는 집주인이 모은 항아리가 많이 있어서 그 중에 김장독으로 알맞은 것을 골라서 묻기로 했습니다. 적당한 크기의 김장독 4개를 깨끗이 씻어서 구덩이에 묻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배추김치, 동치미, 총각김치, 백김치를 담는 항아리를 차례로 어깨 나란히 묻어놓으니 마음이 왠지 흐뭇합니다.
항아리 사이에는 볏짚을 싸서 온도의 변화가 크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 위에 흙을 왕겨와 섞어 덮어주고 발로 자근자근 밟아 다독거렸습니다. 김칫독 주둥이가 흙보다 조금 높게 나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김장독 주변에는 앞 정원에 떨어진 솔잎 낙엽을 쓸어다 깔아두어 나중에 김치를 꺼내러 갈 때 흙이 신발에 묻지 않도록 했습니다. 김장독을 묻는 작업을 완성하고 나니 온 몸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듭니다.
"여보, 김장독 묻는 작업 완성했어요!"
"우와, 수고하셨네요! 그럼 제일 큰 김장독에 배추김치를 넣고, 그 다음에 총각김치, 홍당무, 백김치 순으로 차근차근 넣어요."
"오케이."
아내가 정성스럽게 버무린 김장자베기를 둘이서 들고 김장독으로 옮겼습니다. 김치를 김장독에 담는 작업을 하면서 아내와 나는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아내는 김치를 위생봉지에 넣어서 김장독에 넣자고 하고, 나는 그냥 항아리에 넣자고 하고... 이렇게 둘이서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나는 아내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뭐, 그냥 아내에게 져 준것이지요.
아내의 의견은 혹시 김치 속으로 벌레라도 들어가는 것을 걱정해서 위생봉투에 김치를 넣어 봉하자는 것이고, 나는 김장독도 숨을 쉬므로 김장독 사이로 신선한 산소가 들어와야만 발효작업을 도와주고 자연그대로의 신선도를 유지된다는 옛 문헌을 참조하여 그냥 넣자고 한 것인데, 사실 김장독을 손수 묻은 경험이 없으므로 어떤 것이 좋은 지 나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침 집에는 천연재료를 사용해서 구운 오래된 항아리가 있어서 김장독으로 쓰기에는 최적의 상태인 것 같습니다. 옛 항아리들은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냈는데, 그 항아리의 파편을 현미경으로 관찰을 하면 수많은 기공들이 모여 그 기공사이로 김장독이 숨을 쉰다는 것입니다. 그 숨구멍으로 신선한 산소가 들락날락하며 유산균을 만들면서 김치가 숙성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물이나 그 밖의 내용물은 절대로 통과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여튼… 아내의 의견을 좇아 내가 김장독을 열고 위생 비닐을 열자 아내가 차곡차곡 김장배추와 무를 한 포기씩 눌러서 담았습니다. 김치를 가득채운 김장독 맨 위에는 우거지로 덮고 무거운 돌을 올려놓았습니다. 땅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김치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우리들의 행복 다발을 땅속에 저장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저 김치들이 겨우내 땅속에서 폭 삭아 깊은 맛을 내줄 생각을 하니 저절로 입에 군침이 고입니다. 그 곰삭은 김치를 친구들이 오거나 손님이 오는 날 한 포기씩 꺼내서 북북 찢어먹고, 김치찌게도 해 먹을 생각을 하니 그냥 포근해지기만 합니다.
김장포기를 김장독에 다 저장을 한 후에 뚜껑을 덮는 마무리 작업이 남았습니다. 이곳 연천은 기온이 영하 20~30도까지 내려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김장독 뚜껑이 얼지 않도록 채비를 세심하게 끝마무리를 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심 끝에 철물점에 가서 방한덮개를 2m정도 사서 세 겹으로 접고, 그 안에 안 입는 옷가지 등을 두텁게 넣어서 비닐을 씌웠습니다. 그 방한 덮개를 김장독 뚜껑에 덮고 그 위에 스티로폼을 덮어서 무거운 돌로 눌러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솔잎 낙엽을 두텁게 깔고 다독거려서 땅이 얼지 않도록 덮어두었습니다.
이렇게 정성을 들였으니 영하 30도의 날씨에도 끄떡없이 얼지 않고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며 김치가 맛있게 곰삭아 가겠지요. 눈이 폭폭 내리는 추운 겨울 날 곰삭은 김치를 한 포기씩 꺼내 먹을 생각을 하니 그저 마음이 포근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