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방랑/108일간의세계일주

[프라하2] 촉촉한 프라하의 여인, 니키

찰라777 2006. 1. 7. 09:45

 촉촉한 프라하의 여인, 니키

 

 

▲ 드레스덴에서 프라하로 가는 열차에서 만난 '프라하의 여인' 니키. 그녀는 영화 '프라하의 봄'에 나오는 '사바나'를 연상케 한다.


프라하로 가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 흐미...그녀의 눈은 사비나처럼 촉촉해.

풋풋한 사과같은 싱그러운 볼, 이지적인 눈동자에 눈에 잘 어울리는 메끈한 콧날, 테레사와 사비나를 반반 닮은 여인... 아니  테레사보다는 사비나를 더 닮은 모습이다. 허지만 약간은 우수에 젖은 듯한 표정이기도 해....

여행에 지친 나그네에게 사비나와 같은 프라하의 미인을 만나는 것은 청량감을 던져주는 횡재중의 횡재다.

저런! 남자라면 한 눈에 반해 딱 한 번만이라도 사랑을 하고 싶어지는 아름다운 프라하의 아가씨가 바로 내 앞에서 책을 읽고 있다. 그녀의 미소는 사비나의 미소처럼 매우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은 ‘안나 카레니나’는 아니었지만, 나는 마치 그녀가 영화 속의 주인공 테레사가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아아, 그러니 프라하로 가는 긴 열차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두고 어찌 침묵만 하고 갈수 있을 것인가? 뭔가 그냥 말을 걸고 싶어진다.

 

“저어, 어디까지 가시나요?”
“프라하까지요.”
“저와 목적지가 같군요. 저는 한국에서 온 초이라고 하구요, 이쪽은 저의 아내입니다.”
“저는 니키라고 해요.”
“드레스덴에 살고 있나요?”
“아니요, 프라하에 사는데 드레스덴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지요.”

그녀의 이름은 니키 니콜리나(Nekki Nikolina).
시각 디자인을 전공한다는 니키는 드레스덴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고 프라하에서 일을 한단다. 어쩐지 자로 디자인된듯 아름답더라.

그러면 그렇지. 나는 전혀 그녀가 독일 여자스타일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어. 자유를 갈구하는 프라하스타일의 촉촉한  여인임을 직감했다고...

그걸 알면서도 나는 괜히 말을 걸기위해서 이것저것을 물어보고있는거야.

 

여행중에는 다른 여자와 대화를 할 때에는 아내가 함께 있는 것이 오히려 큰 도움을 준다니까. 홀로 여행을 다니는 낯선 남자가 불쑥 말을 걸을 때보다는 아내가 옆에 있는 경우 상대방은 경계심을 풀고 훨씬 부드럽게 받아준다니까.

 

이번 여행 중 덴마크 코펜하겐에서는 둘리 자매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나타샤를, 그리고 오늘은 니키가 그런 상황이다. 만일 내가 홀로였다면 니키가 이렇게 따뜻하게 내말을 받아 줄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프라하엔 초행인가요?”
“네, 그렇지만 영화 ‘프라하의 봄’을 아주 감명 깊게 본 터라 프라하는 눈에 익은 느낌을 가지고 있지요.”
“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 영화요! 멋진 영화지요. 허지만 프라하의 밤길은 조심을 하셔야 한답니다.”

프라하에는 도둑도 많고, 날치기도 많단다. 뭐? 우수에 찬 푸른눈의 매력적인 여인을, 바바리코트 깃을 세운 멋진 남자를 조심하락 하라고... 그건 십중팔구 소매치기니까. 그러니 한눈을 팔면 안 된다는 것.

 

고마운 니키. 니키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느새 기차는 프라하 중앙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울린다. 이런 밤에는 기차가 좀 더 길게 가도 되는데…

 

▲우수에 젖은듯한 푸라하 시가지 전경. 빨간지붕이 인상적이다.


나는 아내와 니키를 나란히 앉혀놓고 기념촬영을 했다. 프라하의 봄에서 카메라의 앵글을 열심히 돌리던 우리의 테레사를 생각하며. 중앙역에서 버스를 타러 오는 길은 어둡다. 니키는 이 길이 때로는 강도가 출몰하는 매우 위험한 길이라고 귀띰해주며 함께 동행까지 해준다. 미인이길 안내까지 해주다니, 이거 공중에 붕 뜨는데...

“역서 5번 트램을 타고 시티 센터에서 내리면 찾고자 하는 숙소와 매우 가까워요.”
“니키, 당신은 너무나 친절하시군요.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행운을 빌어요!"


이제 니키와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니키는 우리가 트램을 탈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마침내 5번 트램이 프라하의 뒷골목에서 으르렁거리며 다가온다. 우리가 트램에 오를 때까지 니키는 기다리고 있다가 트램이 출발하자 어두운 가로등밑에서  손을 흔들어 준다. 가로등밑의 그녀가 더  아름답게 보인다.

“니키! 안녕!”
“굿 럭키 미스터 초이!”

 

▲ 프라하의 밤거리. 가로등이 동양적이다.

 

니키, 아니 테레사 같은 사비나같은  프라하의 촉촉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

복 받을 여인....

 

그러나 나는 다시 테레사를 생각한다. 그리고 내 인생의 시간 속에 내가 만났던 테레사들을 생각해 본다. 어떤 남자들에게나 젊은 날의 테레사는 있으리라. 만약에 그러한 추억 한 장 없다면 얼마나 삶이 건조하겠는가. 분명 나에게도 젊은 날 따스한 온기를 주었던 테레사에게 차가운 상처를 주었던 기억이 있었다. 이 땅에 테레사를 울린 남성들이여, 회개하라!


남자는 과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인가?
허지만 남자는 언제나 무거운 땅처럼 안정된 여인의 따스함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여인에게 다시 돌아간다. 귀소본능. 바람둥이 토마스가 제네바에서 다시 테레사를 찾아 가듯이….

오오, 그런데 나의 테레사는 바로 내 곁에 있질 않는가?

테레사, 잠시 한눈팔았던 나를 용서해주오. 난 단지 잠시 풍선처럼 하늘을 날기만  했을 뿐이니까.  어두운 골목을 밝히는 밤거리의 등불이 서울의 성북동 어느 뒷골목을 연상케한다.

 

▲프라하의 밤 골목은 어둡다. 그러나 가로등 불빛이 어디선가 낯익은 듯 포근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나는 가물거리는 가로등불을 따라 아내의 손목을 잡고 오늘 밤 묵을 우리들의 보금자리인 여행자 숙소를 찾아가고 있다.  아내의 손은 따뜻하다.  

 

드디어 '프라하 여행자 호스텔(Prague Traveller Hostel)'이다. 프론트 데스크엔 머리를 박박 깎고 수염을 기른 젊은 사내가 우리를 맞이한다. '땡중처럼 생겼군.'

 

예약을 하지 않고 밤늦게 그냥 찾아가다 보니 가장 형편없는 방을 배정 받는다. 그러나 동유럽의 중심 도시답게 방값은 녹녹치 않다. 1일간의 숙박료 1,040코루나(약 4만원)를 지불하자니 속이 쓰리다.

 

"아휴~ 너무 비싼데?"

"그래도 다른 데보다는 무척 쌉니다. 프라하엔 빈방이 없어요."

"여보, 어쩌지?"

"빈방이 없다는데, 그냥 들어가지요."

 

울상으로 망가진 아내의 표정을 바라보며, 땡중같은 종업원은 다른 데로 가도 좋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 밤에 무거운 배낭을 걸머지고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냥머물자.

 

 어두운 계단, 호스텔의 계단은 마치 테레사가 참을 수 없이 바람을 피워대는 남편을 배반하고, 어느 남자와 풋 사랑을 나누기 위한 시험을 하기 위해 찾아 갔던 아파트의 계단보다 더 형편없이 낡아 보인다.

 

철장으로 둘러쳐진 5층 방에 들어가니 이미 다른 보헤미안들이 침대에 침낭을 마치 누에 허물처럼 벗어놓고 배낭을 아무렇게나 팽겨 처 놓고는 외출중인지 사람은 없다.

 

4인용 합숙실. 나는 맨 마지막 구석에 남아있는 군용침대처럼 생긴 침대에 아내의 짐을 받아 풀고 철새처럼 오늘 하루 보금자리를 튼다.

 

 

“당신 괜찮겠어?”
“괜찮지 않으면 무슨 다른 수가 있나요?”
“너무 험악해서 말이야.”
“어차피 등대고 자기는 마찬가지예요.”

 

이미 여행자 숙소에 이굿해진 아내의 모습이다.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로 1000년 동안 영화를 누렸던 중세의 고도 프라하의 밤은 이렇게 시작된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어차피 동양에서 온 보헤미안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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