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일간의 세계일 주 배낭여행 여정도
...바이킹 향수...
| '바이킹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배의 밑창만 남아 있는 투네 호의 모습 피오르드에서 인양된 바이킹의 배들은 8~9세기에 제조된 것으로 수장용이나 항해용으르로 사용되었는데 선체의 곡선이 매끈하여 스피드가 뛰어 났다 함. |
| 라면으로 아침을 때우고 호스텔을 걸어나오는 상쾌한 아침! |
□ 상쾌한 오슬로의 아침 히야! 운전수를 3번이나 교대하며 갔던 지루하기만한 오슬로행 버스. 거기에다 아닌 밤중에 홍두께격으로 한 밤 중에 갑자기 일어나라고 흔들어 깨는 소리에 눈을 뜨니, 운전수가 차를 갈아타야 한다고 하면서 빨리 내리라고 했다. 직행으로만 갈 줄 알았던 오슬로 행 버스가 이렇게 우리를 힘들게 만들 줄이야!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예전에 미리 알았더라면 기차를 탔을걸…. 오슬로에 도착한 시각은 이 제 막 어스름한 여명의 아침이 시작되는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유럽의 북쪽 끝에 있는 노르웨이는 국토의 70% 이상이 빙하와 산, 협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서 버스는 길을 가다가 툭하면 피오르드를 건너야 하는데, 이 때는 버스도 사람도 함께 배를 타고 간다. 노르웨이의 배들은 버스를 뒤로 먹어치우고 앞으로 토해낸다. 뒤로 들어갔다가 뒤로 빠져 나오는 우리나라의 페리 호들과는 근본적으로 구조부터 다르다. 산이 많은 지형이니 길 또한 꼬불꼬불하여 시간이 더디게 걸릴 수밖에 없다. 국토의 30%가 북극권에 속하고 있고, 15만 여개의 섬이 있는 복잡한 노르웨이 의 지형. 그러나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은 고작 2000여 곳에 지나지 않는다. 남북으로 좁고 긴 코부라 모양을 하고 있는 땅은 가장 좁은 부분은 폭이 겨우 6.3km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노르웨이는 여름에는 해가 18시간 이상지지 않는 백야 현상을 나타내고, 겨울에는 하 루종일 눈을 반쯤 뜨고 있는 게슴츠레한 날씨가 지속되고 있는 특이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 도시 전체가 전원같은 오슬로 | 이러한 험난한 지형과 기 후의 특성 때문에 노르웨이 사람들은 밖으로 일찍이 진출하기 시작하여 바이킹이라는 유랑생활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바이킹의 나라' 노르웨이는 1만년전 부족공동체에서 시작해 8세기 이후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지금의 아일랜드까지 진출한다. 노르웨이는 덴마 크, 스웨덴 바이킹 3국이 서로 밀고 땅기는 주도권 다툼을 하며 수차례에 걸친 분열과 재통합을 하다 가 1905년 뒤늦게 오늘의 독립국 가를 수립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한 때 북쪽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들쑥날쑥한 피오르드 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 서 노르웨이(Norway)라는 나라명도 ‘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는 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역시 피오르드 안쪽에 깊숙이 자리 잡은 인구 46만의 고요한 도시이다. 어스름한 여 명의 시간에 도착한 오슬로의 거리는 시간이 정지 된 듯 매우 한산하고 깨끗했다. 도시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공원 같은 냄새가 난다. 밤새 버스에서 시달린 우리는 너무 피곤하여 택시를 타고 유스호스텔로 가기로 했다. 택시 운전수는 매우 친절하게 응대하며 호스텔에 우리를 내려주었는데, 눈 깜박할 사이에 요금은 108크로네(1만 7천 원 정도)가 나왔다. 비싸다 비싸! 앞으론 절대로 택시를 아니 탈것 이다. 노르웨이에서 택시를 타면 내가 성을 갈고 말리라! | Obeberg호의 날렵한 위용. 834년에 축조된 이집트 여왕용 선박. | 'Oslo Vandrerhjem Haraldsheim' 호스텔은 푸른 잔디가 시원하게 펼쳐진, 매우 전망이 좋은 구릉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50대로 보이는 호스텔 종업원이 씽긋 웃으며 무거운 배낭을 걸머지고 헉헉대고 있는 우리를 반겨 주었다. 더 블 룸을 1 박에 490크로네, 시트요금은 별도로 100크로네를 받았다. 만만치 않은 숙박비였다. 나는 Oslo 1day Pass 두장 값까지 합하 여 970크로 네(약 16만원)를 지불하고 시트를 받아든 체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이고, 징하내요. 시트는 그냥주면 안되나요. 100크로네나 받다니….” “별 수 없는 일 아니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벌레 씹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내를 달래며 2층 방으로 올라갔다. 잠은 이미 버스에서 설친 것이고, 아 침을 해 먹고 난 후 오슬로 사냥에 나서기로 했다. 알큰한 라면이 먹고 싶다는 아내는 배낭에서 비닐로 애지중지 말아온 컵 라면을 풀 어냈다. 후르륵 후르륵 행복한 라면 먹기를 끝낸 우리는 왕자와 공주도 부럽지 않게 느긋한 마음이 되어 작은 배낭을 챙겨들고 호스텔 의 문을 나섰다. □ 나는야 용감한 바이킹! 호스텔에서 다운타운으로 가는 15번 트램을 타려면 넓은 잔디밭을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변두리에 있는 호스 텔이 이렇게 온통 푸른 잔디밭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오슬로는 도시 전체가 전원도시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상쾌한 기분으로 잔 디밭을 걸어가는 아내와 나는 정말 왕과 왕비가 아침을 먹고 전원을 산책하는 기분이 된듯했다. 라면을 먹든, 칼질을 하며 폼을 잡고 거창한 아침을 먹든, 이 신선한 공기와 푸른 잔디를 향유하는 즐거움은 똑 같지 않겠는가? 고급 승용차가 대기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승용차가 대기중이라면 이 싱싱한 잔디밭을 걷지 못하는 불행을 좌초하고 말것이니 말이다. | Obeberg호의 아름다운 곡선. 영화에서나 보았던 전형적인 모습이다 | 우리가 오슬로에서 첫 번째로 가기로 한곳은 바이킹 박물관이었다. 바이킹의 나라에 왔으니 바이킹 의 문화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15번 트램은 곧 도착하였다. 1 day pass의 위력이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북유럽을 여행할 때는 오슬로 카드, 스톡홀름 카드, 헬싱키 카드 등의 패스가 사용하기에 매우 편리하고 결과적으로 값도 저렴하게 들어간다. 버스, 지하철, 전철, 도시 내의 페리 호는 물론, 박물관 무료입장이나 혹은 각종 할인 혜택이 주어질 뿐만 아니라, 표를 사는 시간도 절약되기 때문이다. 즉 수륙 양용에다 유적지까지 커버하는 만능 역할을 한다. 중앙역에서 바이킹 박물관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을 길 가는 아주머니에게 물어 보았더니, 친절하게도 정류장 까지 걸어가는 기염을 토하며 손수 안내를 해주었다. 우아한 미소를 머금은 50대 숙녀의 여유가 매우 돋보였다. 노르웨이의 역사 는 탐험의 역사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멀리는 바이킹의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북극을 탐험한 난센, 세계 최초로 남극을 탐험한 아 문젠, 콘티키 호 를 타고 페루에서 폴리네시아까지 항해한 혜예르달…. 이들을 기념하는 박물관들이 Frognerkilen 만 건너바닷가 에 함께 운집되어 있다 . 하얀 백색의 벽이 교회를 연상 시키는 바이킹 박물관의 내부로 들어가니, 둥근 막사처럼 생긴 전시실이 나오 고, 영화에서나 보아왔던 목이 긴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하는 바이킹의 선체가 하얀 벽과 대조적인 암갈색의 모습으로 클로즈업 되어왔 다. 바로 입구에 전시된 오세베르크 호는 834년에 축조되어 1904년에 발굴된 이집트 여왕의 선박이다. 전시되어 있는 3척의 선박 중 가장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선체의 곡선이 매우 아름다운 고크스타드 호, 배의 밑창만 남아있는 투네 호의 모습도 특이하다. 피오르드에서 건져 올린 이 선박들은 모두 수장(水葬)을 위한 장례용 선박이었다고 하니 명당은 바다 밑에도 있는 모양이다. | 900년대에 활약한 Gokstad 호. 곡선이 매우 아름답다. | 바이킹 박물관에서 나온 우리는 콘티키 박물관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막 들기 시작하는 숲 속의 단풍이 너무 아름다운데다가 날씨 또 한 북유럽에서는 매우 보기 힘든 쾌청한 하늘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겐에 머무는 동안 내내 비속에 갇혀 있다보니 따사로 운 햇빛이 그리워 질만도 했다. 그러나 콘티키 박물관까지 걸어가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곳에는 콘티키 박물관을 비롯 하여 바로 건너편에 프람호 박물관 Frammuseet, 노르웨이 해양박물관 Norsk Sjefarmuseum 들이 함께 붙어 있었다. 난센과 아문젠의 북 극과 남극 탐험 사를 한눈에 불 수 있게 전시된 거대한 프람호의 위용은 과 히 혀가 내둘려지게 한다. ‘앞으로’란 뜻을 지닌 프람 호는 항아리 모양의 독특한 설계 때문에 빙하로 가득 찬 북극과 남극을 안전 하게 항해하여 정복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저게 모아이 상이군요!” “제주도의 돌하루방과 비슷하게 생겼네.” “저 머나먼 섬을 돛단배 한척으로 갔다니… 우리도 과연 저 섬에 갈 수 있을까요?” “우린 파피루스로 만든 배가 아닌 비행기로 날아갈 것이니 마음만 먹으면 금 새 도착하지 않겠소?” | 북극과 남극을 탐험하는데 사용했던 프름 호(프름호박물관) | 아내는 콘티키 박물관에 전시된 모아이상이 매우 신기한 듯 요리 저리 훑어보며 말했다. 아마 아내는 남태평 양 한 가운데 외로이 떠 있는 이스터 섬까지 간다는 것이 아직 까마득하여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전설적인 인디오의 항해를 믿 고, 그 가설을 증명하 기 위하여 1947년 돛단배 한척으로 8000km를 항해하는 데 성공한 혜예르달 Thor Heyerdahl의 사진을 바라보다가 나는 갑자기 ‘80일간 의 세계일주’를 쓴, 프랑스의 소설가 쥘 베른이 떠올랐다. 프랑스 항구 도시 낭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부 터 바다너머에 있는 미지의 땅을 동경한 공상가였다. 그는 열 한살 때 사촌누이를 사랑하여, 산호 목걸이를 선물하려고 인도행 무역선 을 몰래 탓다가 아 버지에게 들켜서 돌아온 엉뚱한 인물이다. 혜예르달이 인디오의 무모한 가설을 입증하기 위하여 101일 동안 항해를 한 것이나, 쥘 베 른이 필리어스 포그라는 엉뚱한 인물을 등장시켜 2만 파운드를 걸고 80일 동안 세계일주에 뛰어들게 한 것이나 모두 가 엉뚱한 가설에 서 나온 발상이 아닐까? 모든 탐험은 하나의 가설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아직 지구의 최북단 노르웨이에서 맴돌고 있지만, 머지않아 남태평양의 망망대해에 한 점처럼 떠 있는 이스터 섬까지 가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의 가설이다. 단지 돛단배가 아닌 비행기로 날아간다는 차이뿐…. 그러나 몸도 성치 않는 이 동양의 이방인이 오직 단 둘이서 지구를 돌아돌아 그 섬까지 간다는 것은 어쩌면 혜에르달의 모험이나, 쥘 베른의 무모한 내기보다 훨씬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골치가 지 근거리기 시작하였다. 이 어눌한 남자 한 사람만 믿고 세계일주에 따라나선 아내의 위험한 용기를 생각하노라니 이제 근육까지 마비가 될 듯 떨려왔다. | 오슬로 민속 박물관의 노르웨이 전통 목조 건물. | “이 봐요! 당신은 과연 저 이스터 섬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돼?” “오직 당신을 믿고 그냥 따라 가는 것뿐이에요.” “당신 참 용기 하나는 가상하단 말이야. 좋아, 나를 끝까지 믿어 보겠다 이 말씀이지?” “그럼 내가 누굴 믿겠어요?” “죽어도 후회 하지 않겠다 이 말씀이지?” “우린 아직 죽지 않고 숨을 쉬도 있잖아요?” 과연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던 사람의 용기는 가상하다. ‘죽느냐 사느냐?’의 고비 까지 갔다 왔던 아내는 이제 세상을 사는데 겁이 없다. 아내보다 오히려 내가 겁이 더 많다. 그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나는 지금 노르웨이 있으니 용 감한 바이킹이 아닌가! 콘티키 박물관에서 나온 우리는 노르웨이 민속박물관으로 들어가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여 마셨다. 중세 이 후 지은 170여 채의 노르 웨이 전통 목조가옥을 전시한 야외박물관은 비슷한 종류의 박물관중 세계 최대. 최고를 자랑하고 있다. 우리 는 12세기 목조교회인 스 타브 교회 앞에서 어린애들처럼 뛰어다녔다.
...콘티키 호 박물관...
...프름호 박물관...
...바이킹 박물관...
| 배 밑창만 남아있는 Tnne 호. 원거리 항해용으로 추측됨 |
| 나는야, 용감한 바이킹! 이집트 여왕의 선박용으로 사용했다는 오세베르크 호 앞에서. |
♬~ I Am A Viking - Yngwie Malms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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