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시인' 쇼팽을 찾아서
다음날 아침 7시. 우리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10월의 바르샤바는 춥다. 동유럽의 내륙에 위치한 동토의 땅 폴란드는 겨울이 일직 찾아온다. 오늘 밤 숙소로 찜해둔
Szkolne Schronisko 유스호스텔은 중앙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중앙역에서 오코타행 트램 12번을 타고
6번째 정거장인 Centrum Wola 백화점에서 내려 표지판을 따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가이드북에 나온 대로 우린 12번 트램을 탔다.
▲바르샤바 중앙역 광장. 바르샤바 여행은 이 중앙역에서 내래 일직선으로
시작된다.
밤새 흔들리는 기차를 타고 온 탓인지 피곤하고 배낭이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프라하에서 무려 10시간이 넘게 달려왔으니 아무리 기차여행에 익숙하다고 할지라도 이 나이에 무리가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바르샤바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은 쇼팽이다. 내가 처음으로 쇼팽을 알게 된 것은 시골 벽촌의 초등학교 도서실에서 읽은 쇼팽의
전기를 읽으면서부터였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에서 태어난 그는 조국 폴란드를 사랑하고 피아노의 음률로 조국을 사랑하는 시를 읊었던
'피아노의 시인'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 후 나는 쇼팽의 이별의 곡, 즉흥환상곡, 야상곡 등을 즐겨 듣게 되었고, 최근에는
유태인 천재 피아니스트 블라디스프 스필만의 생애를 그린 'The Pianist'란 영화를 통해서 더욱 깊이 빠지게 되었다. 우리가 멀고 먼
동토의 땅 바르샤바까지 온 것은 순전히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음악을 일생동안 연주해온 스필만의 건반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리라.
▲바르샤바 문화과학궁전. 스탈린이 폴란드로 다시 돌아올것을 다짐하며
세움.
센트럼 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니 하늘을 찌르는
건물이 유독 눈에 띤다. 스탈린이 세운 문화과학궁전이다. 스탈린은 언젠가는 폴란드로 다시 돌아 올 것을 다짐하며 이 건물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폴란드인들은 침략자가 건축한 건물이라고 해서 '구소련이 만든 바르샤바의 무덤'이라고 부른다.
세계 제2차 대전을 치르면서
도시의 80%가 폭격으로 파괴되고 시민의 70%정도가 죽음의 길로 가야했던 비극의 도시에 또 다른 점령군 소련은 영원히 이 땅을 지배할 목적으로
이 건물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우린 이런 건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어서 빨리 짐을 풀어놓고 쇼팽의 심장이 안치된 성 십자가
교회와 쇼팽 박물관 등 쇼팽의 흔적을 돌아보고 싶다.
호스텔에 들어서니 안내 데스크의 직원이 어쩐지 냉랭하다. 그날따라 지방에서
올라온 중등학생들로 호스텔은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 아내는 긴 여행에 지쳤는지 호스텔 데스크 앞 의자에 기대 앉아 눈을 감고 있다. 가까스로
방을 배정 받아 키를 받아들고 아내를 일으켰다. 짐을 풀어놓은 나는 공동욕실로 샤워를 하로 가는데 아내는 그냥 침대에 길게 누워 버린다.
우리는 왜 이런 힘든 여행을 다니는 것일까? 한숨을 자고난 아내는 다시 기운을 차린 듯 거리로 나가자고 한다. 안개 같은 여인.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은 것'이 아니라 '안개꽃'과도 같다. 내가 바라보는 여자는 아름답지만 안개꽃처럼 가려져 속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죽을 것만 같은 표정을 지을 때는 언제고 조금 기운을 차렸다고 해서 금방 나가자니…
칼과 방패를 든 인어동상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칼과 방패를 든 인어동상.
착한사람에게는 반드시 행운이 깃들인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는데...
호스텔을 나온 우리는 다시 트램을 타고 신세계 거리를 지나 왕궁이
있는 구시가지로 향한다. 최고급 부띠끄가 모여 있는 파스텔 톤의 신세계 거리는 전통 있는 카페와 유명 레스토랑이 모여 있어 부유한 폴란드인들이
쇼핑을 하고 휴식을 하는 바르샤바의 명소다. 그러나 전쟁으로 완전 폐허가 된 후 된 도시의 구조는 무언가 어설프다.
우리는 왕궁이
바라보이는 거리에서 내려 구 시가지를 걷기 시작했다. 아마 쇼팽과 스필만도 이 거리를 신발이 달토록 걸어 다녔으리라.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생존을 위해 유령처럼 처절하게 헤매 다니던 영화 속의 스필만이 다시 떠오른다. 그러면서도 손가락의 유연성을 잊지 않으려는 듯 눈을 감고
틈만 나면 건반을 두드리는 스필만의 모습은 쇼팽의 즉흥환상곡 만큼이나 환상적으로 내게 다가온다.
▲구시가지 왕궁 앞에서. 동토의 땅 바르샤바의 10월은 춥다. 어,
추워!
스필만이 유대인 케토를 탈출한 뒤 생존을 위해 은신처를 옮겨 다니는
동안 1943년 바르샤바 거리에서는 유태인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이듬해에는 바르샤바 시민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모두가 저승으로 가는 저항운동을 스필만은 창문 너머로 안타깝게만 바라다 볼뿐 직접 봉기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용감하지 못한
겁이 많은 피아니스트였다. 그러나 나는 충분히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다.
그래서인지 스필만은 2000년 7월 89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며 오직 쇼팽만을 연주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용감하지 못했던 유태인 피아니스트는 그 후에도 계속 공산당의
감시를 받았을 것이고, 당의 요청에 따른 군중음악을 연주하며 살아야했던 시간들은 그에게는 또 다른 처절한 살아남기의 과정이 아니였겠는가.
▲유태인 지구 게토에 있는 '게토영웅 기념비. 원래 히틀러의
동상을
만들려고 한 돌로 깎아 세워졌다.
바르샤바 유태인 지구 게토에는 나치에 항전했던 영령들을 위한
영웅기념비가 있다. 여기에 수용되었던 유태인들이 스스로 무기를 들고 나치에 도전을 했으나 완패하여 전원 가스실로 보내져 사살되었다. 달걀로
바위치기였겠지만 그들은 저항했다.
그런데 이 기념비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히틀러가 승전의 기념비를 세우려고 했던 돌로 새겨 만든
것이라니 역사의 수례바퀴가 이 세상의 기념비를 허구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다. 어제의 영웅 기념비가 오늘 헐리게 되는 비운의 세계사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공산주의의 영웅 레닌과 스탈린의 동상이 헐리는 것이라든지, 6.25의 전쟁영웅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논쟁도 따지고 보면 집단 이기주의자들의 역사적인 폭력이라 할 수 있다. 600만 유태인이 아우슈비츠 등 유럽 각지의 수용소로 내몰리어 학살을
당했던 암울한 시기에도 위대한 이스라엘 건설을 주창해온 시오니스트들이 나치의 친위대 조직들과 협력했다는 증거는 허다하다.
“저
인어공주는 코펜하겐의 인어공주하고는 완전히 다르군요.” “음· 칼과 방패를 들고 있는 인어라…”
중앙광장에는 칼과 방패를 든 인어여인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바르샤바의
수호신으로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는 인어조차 창과 방패를 들고 전투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부드러운 것이
가장 강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일까?
하기야 폴란드는 16세기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원자폭탄의 재료로 쓰이는 우라늄에서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 퀴리 부인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한 얼마 전에 타계한 요한 바오로 2세의 고국이기도
하다.
그런 천재적인 기질을 가진 폴란드 민족이 20세기 독일과 러시아의 침공으로 처절한 생존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이것은
일제의 지배와 6.25전쟁을 치른 우리네 역사와 비슷하다. 또한 1980년대부터 자유주의 노조가 출범하여 바웬사를 주축으로 한 민주화 투쟁으로
사회주의 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민주국가를 건설한 것도 ‘80년의 봄’이후 진통을 겪으며 독재정권에서 벗어난 우리나라 정치 현실과 흡사하다.
쇼팽의 심장은
어디에...
▲쇼팽의 심장이 안치된 '성 십자가 교회'의 기둥.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난 쇼팽의 심장은 그의 조국 바르샤바에 안치되어 있다.
그러나 내 가슴에는 바르샤바 하면 무엇보다도 쇼팽이, 그리고 스필만의
피아노 음률이 파동을 치며 다가온다. 우리는 구시가지 광장을 돌아 쇼팽의 심장이 안치된 ‘성 십자가 교회’로 갔다.
“이 교회에
쇼팽의 심장이 진짜 있어요?” “들어가 보면 알게 아닌가.”
그러나 교회 안에서 쇼팽의 심장이 안치된 곳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심장은 무덤이 아닌 그의 이름이 새겨진 기둥 안에 안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 들어가 쇼팽의 심장이 보관된 장소를
찾았지만 쉽게 발견을 못하고 안내인에게 물어본다.
“쇼팽의 심장은 바로 저 중앙에 있는 기둥 안에
있습니다.” “아!…” “세상에 기둥 안에 사람의 심장을 안치 하다니…”
▲성십자가 교회를 찾는 바르샤바 시민들
아내는 믿기지 않는 듯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쇼팽은 프랑스에서
사망했지만 그의 여동생이 그의 심장을 가져와 그의 조국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교회건물이 폭파되면서 쇼팽의
심장도 파헤쳐 졌지만, 교회를 복구하면서 그의 사망일에 맞추어 10월 17일 날에 원래 장소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우리의 주인공
피아니스트 스필만도 이곳을 수없이 다녀갔으리라. 그는 쇼팽이 심장 앞에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는 용감하지 못했던 과거를 피아노의 시인에게
고백하며 후회를 했을까?
'피아니스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필만은 말쑥한
차림으로 쇼팽의 Grande Polonaise brillante를 연주한다. 6년 동안의 유령같은 세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 외양으로
말이다. 실제로 그는 이런 슬픈 흔적을 그의 마음 속에서 지우고 싶은 것 중 하나였다. 스필만의
큰아들 Christopher의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He was pained by the idea that he survived but
anyone else."라고 말했다고 한다.
스필만은 1946년 책을 낸 후 한 번도 그 저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불한당 나치의 통치하에 스필만은 명제는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죽어야 할 개인은 아무도 없지만 그는 그대로 죽는 것이 너무나 억울했고
두려웠다.
그의 생이 가장 최악의 야수로까지 떨어지려 했던 그의 손 끝에 걸린 쇼팽의
피아노곡을 위해서도 그는 살아 남아야 했다. 그리고 그는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심장 앞에서 자신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숙명을 침묵으로
고백했으리라.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기둥 안에 그의 심장이 안치되어 있으리라고 믿기지가
않는다. 성 십자가 교회는 바르샤바 대학 앞에 있다. 교회와 대학 사이에는 동상이 하나 있는데, 그 동상의 주인공은 젊은 날의 코페르니쿠스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크스의 고향이 폴란드라고 아는 사람은
드물다.
젊은 날의 코페르니크스 동상이 바르샤바 대학 앞에 서 있다. 성 십자가
교회를 나와 쇼팽 박물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택시들의 부자 소리가 요란하다. 수많은 택시들이 일렬로 서서 지나가며 빠앙빠앙 하고 부자 소리를
낸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 보니 운전수들이 월급인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단다.
아마 폴란드도 민주화 이후 집단 이기주의로
몸살을 않고 있는 모양이다. 생존권을 부르짖으며 데모를 벌이고 있는 장면은 우리나라의 그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자유는 집단 이기주의를
불러일으킨다. 집단이기주의를 적절히 컨트롤하지 못하면 통제 불능에 빠지고, 민중은 누군가가 질서를 잡아주기를 바란다. 거기에 역사는 어떤
누군가에 의한 칼로 다스리는 독재의 악순환이 고리를 이루며 되풀이 되고 만다.
1,2층으로 이루어진 쇼팽의 기념관은 그가 사용했던
자필편지, 악보 등 2,5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3층은 콘서트홀이다.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50대를 넘을 듯한 여직원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만류한다.
“그만 나가요.” "그럴까?"
▲ 쇼팽이 썼던 유품들.
아내가 지루했던지 나에게 다가와
말한다. 쇼팽의 생가는 바르샤바 근교의 젤리조바 볼라 Zelazowa Wola라는 곳에 있다. 시내에서 버스로 1시간 정도 걸린다는 데 아내의
기색이 피곤하게 보여 포기하기로 했다. 5~9월에는 쇼팽의 생가에서 유명 피아니스트를 초청하여 연주회가 열린다고 한다.
나는 트램을 타고 호스텔로 돌아오면서 폴란드의 천재
피아니스트 블라디스프 스필만이 잿더미 속에서 쇼팽의 곡을 연주하는 것을 상상하고 있었다. 나는 트램을 타고 호스텔로 돌아오면서 폴란드의 천재
피아니스트 블라디스프 스필만이 잿더미 속에서 쇼팽의 곡을 연주하는 것을 상상하고 있었다.
동토의 땅 바르샤바에 와서 쇼팽과 스필만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느끼는 자체만으로도 대 만족이다. 쇼팽의 음악은 바르샤바 어디에나 있었다.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내 마음 속에도…
* Copyright by chall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