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는 기차
▲ 아우슈비츠와 브제즌카 유태인 강제수용소로 연결된 철도
10월 29일 오전 9시. 우리는 바르샤바
중앙역에서 크라쿠프로 가는 급행열차를 탔다. 바르샤바의 유스호스텔에서 더 이상 머물고 싶지도 않거니와 이번 동유럽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하루라도 빨리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제부터 아내가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쇼팽의 심장이 안치되어
있는 성 십자가 교회를 돌아본 후 젤라조바 볼라에 있는 쇼팽의 생가를 가는 것도 포기하고 유스호스텔로 돌아왔다. 그러나 유스호스텔의 현관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아차! 5시까지는 청소시간으로 들어 갈수 없다고 하네.” “그래도 사정을 좀 해봐요. 좀 누워있고
싶어요.”
▲아무리 사정해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바르샤바의 유스호스텔
유럽의 호스텔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청소 등 호스텔 정비를 위해 그 시간에는 호스텔 내에서 머물러 있을 수 없도록 규정한 곳이 더러 있다. 나는 현관문에
달려있는 도어폰으로 문을 좀 열어달라고 전화를 했지만, 역시 대답은 안 된다는 쌀쌀한 호스텔 여직원의 메아리만 들려올 뿐이다. 아내가 몸이
아파서 그러니 부탁을 해 보았지만 역시 대답은 같다.
바르샤바의 10월은 춥다. 아내는 안색이 안 좋아 진다. 하는 수 없이
근처에 있는 카페에 가서 5시가 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카페에서 비싼 커피를 마시고 문이 열기만을 기다렸다가 5시가 되어서야 우리는
호스텔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쇼팽의 생가고 무엇이고 간에 정이 없으니 그런 바르샤바를 빨리 뜨자고 했다. 한국식 사고방식이다.
▲크라쿠프 중앙역의 풍경. 가방을 끌고 가는 풍경 마치 피난을 연상케
한다.
바르샤바에서 크라쿠프로 가는 열차는 매 시간마다 있다. 엑스프레스 열차로
2시간 반 정도 걸린다. 6호차 76번과 75번 좌석. 아내는 앉자마자 눈을 감는다. 그러나 바르샤바에서 아우슈비츠로 가는 열차에 오른
나는 만감이 교차한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조차도 회색빛으로 우수에 젖어있는 듯 하다.
우리에게 과연 정해진 운명이
있는가?
기차를 타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태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다시는 돌아 올수 없는, 기약이 없는 길을 말이다. 사람들에게는 과연 저마다의 ‘운명’이 정해져 있을까? 일테면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는다는 인간의 숙명 같은 운명이 말이다. 내가 아픈 아내와 함께 힘든 여정을 다니는 것도 다 미리서 정해진 운명이란 말인가.
아니다!
"만일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란 불가능하다 (…)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
15세 소년 죄르지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을 그려
노벨 문학상을 수상(2002년도)한 임레 케르테스의 말을 상기시켜 본다. 케르테스는 말한다. 죄르지에겐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매순간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가능성만이 존재한다고. 이처럼 인간에게는 미리 정해진 운명이 없기 때문에 소년 죄르지는 자기 자신이 곧 운명이라고
받아들인다.
▲크라쿠프 중앙역에서 아우슈비츠로 떠나는
완행열차
이는 보편적으로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며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 ‘운명’이라고 치부하며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는 운명론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유대인 종교관에서 바라보는 ‘신의 섭리’,
불교에서의 ‘인과응보’론적인 입장과도 다르다.
죄르지 소년은 먼 미래의 일을 계획하고 고민하는
대신, 눈앞에 닥친 일에 좋은 뜻으로 몰두하며 수용소 생활에 맞추어 최대한 처신을 다한다. 그래서 그는 수용소에서의 끔찍한 체험을 거치고 마침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케르테스의 ‘운명’은 영화 쉰들러리스트에 회자되었던 아우슈비츠의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
쉰들러리스트에서는 악을 저지르는 나치와 선하게 당하기만 하는 유태인의 처지를 ‘선과 악’의 저편에서 선명하게 구분하여 부각시키고 있는 반면,
케르테스는 수용소 생활을 있는 그대로 담담해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나는 살아있다. 살아남기
위하여 모든 관점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제 내가 가게 될 길 위에 피할 수 없는 덫처럼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도 고통들 사이로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죄르지 소년의 운명론에 나는 동의를 한다. 따지고 보면 아내가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기사회생으로 살아나 이렇게
아픈 몸을 이끌고 여행을 하는 것도 우리가 선택한 운명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경이로운가. 그리고 살아서 자기가 선택한 길을
갈 수 있다는 것 또한 최대의 축복이다. 병원에서 생명이 일각에 달려 허덕이는 아내 곁에서도 나는 순간 순간
행복을 느끼기도 했다. 아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언제 내가 그토록 아내 곁에 가까이 다가 설수 있었겠는가. 물론 그 짧은 순간들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힘들고 아파 누워있는 아내가 원망스럽기조차 했으니까....
인간에게 순간순간 일어나는 일들을
운명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체념적인 삶이라는 것을 나는 느꼈다. 찰나의 순간에, 주어진 환경에 무엇인가에 열중하는 모습, 이는 케르테스가 말한
'운명'은 '자기 자신'이다라는 것과 합치한다. 즉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간다는 뜻이아니겠는가.
어쨌든 이번 세계일주중 동유럽 여행의 테마는 단연
나치와 유태인의 관계이다. 나치는 왜 유태인을 그렇게 학살해야 했으며, 유태인들은 또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 문제는 암스테르담에서 스칸 레일 패스로 기차를
타고 북유럽으로, 핀란드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로, 그리고 동유럽 패스로 베를린과 프라하, 바르샤바 그리고 지금 크라쿠프로 가는
기차에서도 풀릴 수 없는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어떤 사람은 증오와 저주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증오와 저주만으로 그토록 600만의 유태인을
학살해야 했다는 것에 나는 동의 를 할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 누구도 아직 그 대학살의 근저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아니 영원히
숙제로 남을지도 모른다.
▲오슈비엥침(아우슈비츠의 폴란드 이름)역에서
내려....
유럽의 전역에는 나치에 저항했던 레지스탕스를
기념하는 박물관이나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반면에 동유럽에는 유태인들이 거주하는 게토와 강제수용소가 있다.
프라하의 게토와 테레진 강제수용소에서 본 수용소
아이들이 그린 그림과 희망의 노래, 그들은 고사리 손으로 그린 그림과 시에서 다시는 나비를 볼 수없다고 부르짖었다. 바르샤바의 게토와 천재
피아니스트 스필만의 생애, 스필만은 야수가 되더라도 살아남아야 한다고 몸부림쳤고, 그리고 그는 살아났다. 나치 시대 이후에 갈라진 베를린 장벽의
비애와 무너진 장벽에 드리워진 빛과 그림자… 이는 마치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의 인과응보적인 결과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것들이 크라쿠프로
가는 기차에서 내내 머리 속을 맴돌고 있다.
오전 11시 35분. 기차는 정확히 폴란드 크라쿠프 중앙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플랫폼에 연결된 지하보도로 내려갔다. 지하보도로 무거운 배낭을 걸머지고 가는 우리는 마치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태인 행색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하보도 한 구석엔 코인라커가 준비되어 있다.
“여기서 바로 아우슈비츠로 가는 기차가 있다는데 당신 컨디션이
괜찮아?” “한 숨 자고 났더니 많이 좋아 졌어요.” “그럼… 짐을 라커에 맡기고 바로 아우슈비츠 행 기차를 타는 게
어떨까?” “괜찮아요. 시간도 아낄 겸 오늘 가는 게 좋겠군요.”
아내를 코인 라커 앞에 기다리게 하고 나는 매표소로 갔다.
마침 10분 후에 오슈비엠침(아우슈비츠의 폴란드 지명)으로 가는 완행열차가 있었다. 기차표를 산 나는 아내에게 뛰어가 큰 배낭을 코인라커에
맡기고 오슈비엠침으로 가는 플랫폼으로 올라갔다.
드디어 아우슈비츠로 가는 기차가 출발한다. 열차 내에는 가난한 폴란드인들로 가득
차 있다. 기차는 가는 역마다 다 선다. 하늘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다. 어디선가 타는 듯한 냄새가 차창으로 스며든다.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든 청년
▲붉은 장미 한송이를 든 청년이 아우슈비츠로 가고 있는 기차에서 눈을 감고
있다.
"장미를 든 저 청년의 표정이 어쩐지 서글퍼
보이는 군요." "아마 그의 가족중에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던 사람이 있는 모양같은데..." "아, 생각만해도 정말 너무나 끔찍한
일이에요.
우리 바로 옆 좌석에는 장미꽃 한 송이를
차창 유리에 놓아둔체 한 청년이 눈을 감고 있다. 그도 아마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는 모양이다.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지만 눈의 감고 있는 그를
깨우기가 미안하다.
장미꽃과 아우슈비츠! 이 장미꽃에 얽힌
아우슈비츠의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자. 하여간 빨간 장미꽃 한송이를 든 청년의 표정이 우수에 젖어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의 아버지가?
아니면 할아버지가? 하여간 누군가가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것만은 틀림없다. 장미꽃의 헌사!
아우슈비츠로 가는 열차가 역마다 정거를 하자 아내는
다시 피곤한 듯 자리에 눞는다. 1950년대 우리나라 12열차나 다름없는 후진 의자에 모자를 덮고 길게 누워있는 아내는 지쳐
보인다. 색바랜 빨간 의자에 누워 있는 아내의 모습이 마치 전쟁중에 피난을 가는 사람을 연상케 한다.
▲아우슈비츠로 가는 완행열차에 길게 누워있는 아내가 마치 전쟁중의 피난민
같아..
“이거… 우리도 마치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기분인데… 아우슈비츠로 가는 당신 소감이어떠하오?” “소감… 뭐 소감이랄 게 있나요. 그저 그 시대를 생각하면 소름이 기칠
따름이에요.”
내가 다소 정색한 표정으로 비디오를 들이대며 아내에게 아우슈비츠로 가는 소감을 묻자 아내는 치를 떠는 흉내를 내며
정말 소름이 끼치는 표정을 짓는다. 나 역시 소름이 끼쳐 온다. 우리와 동시대의 일이 아닌가.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 학살이 자행 될 때에
우리나라에서는 해방되기 전후의 불안한 정국과 곳곳에서 빨치산 전투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6.25의 비극!
모두가 치가 떨리는 단어들이다.
▲오슈비엥침 역전의 모습.회색빛 색깔이 어쩐이 으스스하게
느껴진다.
아우슈비츠로 가는 기차 길마저 냉랭하고
싸늘하게만 느껴진다. 아우슈비츠에 다가 갈수록 어깨가 움추러 드는 기분이다. 기차는 2시간 여 만에 드디어 ‘오슈비엠침’역에 도착한다. 역에서
내리니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오슈비엠침 역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는 셔틀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수용소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유태인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아우슈비츠 인간 살인공장으로 가는 길을 우리가 서두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우슈비츠는 오후
4시에 문을 닫는다. 붉은 장미 한송이를 든 청년도 우리와 같은 버스에 서둘러 오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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