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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아우슈비츠에 바쳐진 장미꽃의 헌사

찰라777 2006. 4. 12. 13:55

아우슈비츠에 바쳐진 장미꽃의 헌사

 

-아우슈비츠 수용소 희생자 사진에 걸려진 장미꽃

 

 

유가족들의 소리없는 통곡

“저기 저 사람들 흐느끼고 있군요.”
“내가 보기엔 소리 없는 통곡을 하고 있어.”

‘일하면 자유로워진다(ARBEIT MACHT FREI)'


수용소정문에는 녹 슬은 나치시대의 간판이 아직도 바람에 흔들리며 을씨년스럽게 걸려 있다. 수용소 정문을 통과하여 수감자들의 사진을 걸어놓은 복도에 도착하니 어느 소년과 중년부인이 장미꽃을 꽂아둔 사진 앞에서 서로 포옹을 하며 공포에 질린 듯 울고 있다. 소리 없는 통곡이다. 사진의 대상은 아마 소년의 할아버지 쯤 되지 않을까?


 

- 수용소 복도에 진열된 희생자들의 사진

 


버스에서 내려 우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발걸음을 옮길 때 하늘은 회색으로 무겁게 내려 앉아 있었다. 게다가 빗방울마저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는 마치 이곳에서 죽어간 200만 유태인들의 영혼들이 흘리는 눈물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사실 이 아우슈비츠를 방문하기 위하여 동유럽 땅을 밟았다. 우리의 이번 동유럽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다. 바르샤바에서 기차를 타고 크라쿠프를 거쳐, 곧장 아우슈비츠로 달려온 우리는 마치 반세기 전에 나치에 의해 끌려온 유태인의 비통한 심정과 같다.


 

-'일하면 자유로워진다'는 아치가 세워진 수용소 장문 입구

 


우리에게 다른 게 있다면 강제로 끌려온 게 아니라 스스로 왔다는 점, 가슴에 ‘다윗의 별’을 달고 있지 않다는 것 등이다. 넓은 들판에 철조망으로 굳게 둘러쳐진 수용소의 외양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이 없는 모습이다.

1944년 당시 15세 소년이었던 임레 케르테스(소설 ‘운명’으로 2002년 노벨 문학상 수상)는 부다페스트에서 어느 날 아침 강제노동을 하러 버스를 타고 가다가 불신검문에 걸려 이곳 아우슈비츠까지 끌려온다. 가족에게조차 어디로 간다는 한 마디의 소식을 전할 수도 없었다.

“누구나 일해야 돼. 지쳐 보여서도 안 되고 아파서도 안 돼.”

불과 15세 소년이었던 그가 아우슈비츠 기차에서 내려 그곳의 유태인들로부터 처음으로 듣는 말은 ‘그는 열여섯 살이고,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지쳐 보이거나 아파서 일을 할 수 없으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

당신이 만일에 15세 소년으로 이곳에 끌려 왔다면 어떻게 처신을 할 것인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처지는 일이다. 세기의 폭력 앞에 절대 복종으로 무기력해야만 하는 암담한 수용소의 비극 앞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전류가 통했던 수용소의 철책

 


소리 없는 통곡!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증오와 복수의 칼이 세상 곳곳에 악마의 발톱처럼 도사리고 있다. 그 비극은 일제 강점기에 시련을 당했던 우리에게도 있다. 8백만 조선인을 강제 징용하여 전쟁터에서 죽어가게 하고, 수없이 많은 위안부를 전선으로 보내 일생을 회한 속에 보내게 하고서도 일본은 속죄하지 않고 있다.

 

저 사진위에 결려진 장미꽃의 헌사가 죽은 자와 살아남은 가족들의 마음을 보상해줄 수 있을 것인가. 장미꽃을 영령에게 바치고 소리없이 흐느끼는 유가족의 심정을 그 누가 보상해 줄것인가.



참회하는 독일인, 뻔뻔한 일본인

“역사에 눈감는 자 미래를 볼 수 없다.”

그러나 1970년 12월 7일 빌리브란트 서독 수상은 폴란드 바르샤바 유태인 게토에 있는 유태인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며 나치의 유태인 학살 및 폴란드 점령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죄를 하였다. 그는 이러한 역사적인 화해와 참회로 197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아우슈비츠 수용소 풍경


바이츠체커 전 독일대통령은 ‘과거에 대해 눈감는 자는 결국 현재에 대해서도 눈멀게 된다’고하며 독일인들의 참회를 촉구하고 있다. 독일인들은 1995년 1월 27일을 강제수용소 해방 50주년을 맞이하여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는 날로 지정하고 있다.

200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을 맞이하여 독일연방 대통령 쾰러도 기념식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 과연 솔직하게 뉘우치는 독일인이다.

독일은 전후에 이스라엘과 배상협정을 맺고 국가배상금 250억 마르크, 나치피해자 유가족 배상금 150억 마르크, 희생자 개벽 배상금 750억 마르크 등 2000억 마르크(약 120조원)에 해당하는 배상을 한바 있다.

 

 

- 바르샤바 게토의 유태인 위령비 앞에서 무릎을 끓고

진정으로 사죄하고 있는 빌리브란트 독일 수상의 모습


 

그러나 이웃나라 일본은 어떠한가?
그들은 참회와 배상은커녕 A급 전범 군신들을 묻어놓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일삼고 있다. 전후 미국의 치마폭에서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은 과거의 기억과 청산을 회피하고 오히려 숨기려 하고 있으니 독일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어떤 역사가는 이를 두고 독일은 기독교적인 ‘죄의 문화’로 받아드리는 반면, 일본은 아시아적인 ‘문화적 수치’로 여기고 있다고 말한다. 중국, 태국, 미얀마, 싱가포르 등 아시아를 여행하는 동안 내내 일본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음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일본은 뻔뻔하다.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아연실색을 금치 못할 일이다. 그들이 과거의 전쟁을 부끄러워 할 날은 언제인가? 참으로 침략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뻔뻔한 일본인이다.

여기에 우리 국민은 함께 뭉쳐 경제력과 국방력을 키워 다시는 일본이 뻔뻔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독일로부터 천문학적인 배상을 받아내는 것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엄청난 유태인의 파워가 두려워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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