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필만의 피아노 음률을 따라 바르샤바를 가다
통조림 깡통과 천재 피아니스트
그대는 아는가,
천재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라프 스필만의 고향
바르샤바를… 만일 당신이 1939년으로 돌아가 기차를 타고 전쟁의 포화 속에 잿더미가 되어버린 바르샤바로 향한다면 그대는 무엇을 생각하겠는가?
참으로… 너무나 참담하게 폐허가 되어버린 바르샤바! 쇼팽의 야상곡과 즉흥환상곡의 음률이 평화롭게 흐르던 아름다운 바르샤바가 나치의
폭격으로 일거에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린 그 참상을 당신은 어떻게 받아드리겠는가?
바르샤바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도시의 80%
이상이 나치의 폭격으로 파괴되고, 시민의 3분의 2 이상이 나치의 폭력으로 살해당하는 끔직한 참상을 간직한 20세기 최대 비극의 도시다.
프라하 중앙역 21시12분 발 2등 칸.
아내와 나는 프라하에서 밤 기차를 타고 전쟁의
잿더미 위에 다시 재건된 바르샤바로 향하고 있다. 기차는 기적소리도 없이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유혹의 도시 프라하를 슬그머니
미끄러져 나가고 있다.
도심을 빠져나가자 이내 어둠이 깔리고 차창에는 쇼팽의 야상곡이 환상적으로 흘러내리고 … 나는 문득
차창에 부서져 내리는 쇼팽의 멜로디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바르샤바의 한 천재 피아니스트와 조우하고 있다. 우리가 바르샤바로 향하는 것은 오로지
쇼팽의 음악을 연주하는 한 천재 음악가의 일생을 다룬 영화 한편에서 느낀 감동 때문이리라.
그의 이름은 ‘블라디슬라프 스필만’.
그의 이야기는 살아날 확률이 50만분의
1이라는 가공할만한 생존 확률이야기다. 세계 2차대전당시 바르샤바에는 약 50만명의 유태인이 살고있었는데, 나치에 의해 거의 모두가
확살되고 말았다. 그 50만명 중에 살아남은 한명이 바로 이 천재 피아니스 스필만이다.
그가 살아남은 것은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폐허속에서 만난 나치 장교, 바로 그가 스필만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두사람의 만남과 잿더미
속에서 스필만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극적인 휴먼스토리의 장면이다.
내가 바르샤바의 천재 피아니스트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영화 ‘The Pianist’란 은막에서였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 영화 ‘The Pianist'는 잔혹한 나치시대에 기사회생으로 살아남은
한 유태인 천재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라프 스필만의 절박했던 일생을 영상에 담은 것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감동에 젖었던 것은
나치나 반 나치, 즉 지금까지 어떤 이념이나 도덕적으로 포장된 과거의 통례를 따르지 않았다는 점, 전쟁과 잔혹한 학살 속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존해야한다는 절박한 인간의 본능, 그리고 구구한 자기변명이 절제된 살아남은 자의 담담한, 있는 그대로의 생의 보고서로 다가온다는
데 있다.
원래 이 야기는 1946년 '한 도시의 죽음'이라는 제하로 스필만이 수기식으로 발행하였으나 공산당에 의해 판금을
당했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이후에 그의 수기는 재출간을 하기 되었다. 그리고 영화화 된것이 바로 이 '피아니스트'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먹을 것을 찾아 유령처럼 헤매던
스필만은 통조림 깡통을 따다가 바닥에 구르는 소리 때문에 한 독일 군 장교에게 발각된다. 좇는 자와 도망자의 숨막히는 침묵이 잠시 흐르는
순간....
살해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완전히 얼어붙은
스필만과는 달리 독일군 장교는 진지한 표정으로 넌 누구이며,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을 한다. 어눌한 표정으로 '피아니스트'였다고 대답한 스필만에게
독일군 장교는 그를 옆방으로 오라고 하여 무슨 곡이든 피아노를 연주하라고 한다.
굶주림으로 피골이 상접한 스필만은 처음에는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다는 두려움 탓인지 손이 굳은 듯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모든 상황을 잊어버리고 오직 쇼팽의 음악(Ballade no1. in
G Minor)에 빠져 열정적으로 혼을 다하여 연주를 한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다! 연주 속에서 스필만과 독일군 장교, 그리고
우리의 관객들 사이에는 수많은 생각과 이야기가 오고 간다. 침묵으로....
스필만의 손은 춤을 추듯 건반 위를 누비고,
독일군 장교는 그의 연주에 깊이 매몰되어 간다. 쇼팽의 음악과 스필만, 그리고 독일군 장교는 모두가 피아노의 음률에
취해 하나가 되어버린 듯 변해간다. 그것은 무념무상의 경계다!
분노와 배고픔, 체념, 좌절이 쇼팽의 음악속에 녹아
없어져 버리고 오직 무념의 경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스필만의 표정과 피아노가 들려주는 멜로디만 남는다. 나는 비디오를 빌려 이 연주
장면을 수차례 리플레이 시키며 반복해서 보았는데도 자꾸만 다시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장면이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
장면은 내 일생에 아직 보지 못했다.(아무리 영화라고 하지만…).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오케스트라 콘서트홀에서 듣는 것보다도 훨씬 진한
감동을 주는 명연주이다.
왜 그럴까? 이는 생과 사의 절박한 갈림길에서 음악이라는 예술 속에 이념을 초월한 따뜻한
인간애가 녹아내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스필만은 연주를 끝낸후 다시 통조림 깡통을 잊지 않고 들고 간다.
쇼팽의 음악과 통조림 깡통…
피아노 연주 세계에서 깨어나자 스필만은
다시 굶주린 생존의 현실이 그로 하여금 통조림 깡통을 품에 안게 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군 장교가 유태인이냐, 숨어사느냐 하며 몇 마디
질문을 던지고 사라지자 스필만은 통조림깡통을 끌어안은 채 오열한다. 살아났다는 안도감, 다시 찾아올지도 모를 공포, 자신의 가련한 처지,
모멸감… 아, 다양한 감정이 섞인 눈물이리라.
러시아군에게 패에 퇴각하는 독일군 장교는
마지막으로 스필만을 찾아와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그의 코트까지 벗어준다. 너무나 감동한 스필만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윽고 말한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신께 감사하게. 모든 게 신의
뜻이고… 우린 그렇게 믿어야지…”
이 순간의 공간에는 아군과 적군, 좇는 자와 도망자는 이미 없다. 오직 인간 대 인간, 음악,
그리고 그들 서로를 보둠어 주는 인간의 따뜻한 마음이 존재할 뿐이다. 그 따뜻한 인간애가 신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영화는 대사가 별로 없다.
총성, 포화, 침묵 속에 조용히 전개될 뿐. 간혹
가다가 쇼팽으 음악이 배경에 갈린다. 궂이 무엇을 변명하려들지 않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 절제되고 조용한 장면이 오히려 관객의 심금을
울린다.
스필만은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살아야 했다.
그리고 살아났다. 6년간의 그 긴 지옥 같은 폐허 속에서 야수처럼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는 목숨을 구걸했던 자신을 그 어떤 것으로도 변명하지도
표현하지도 않는다.
다시 본래의 피아니스트 자리로 돌아간 스필만은 마지막 장면에서 옛날의 그 말쑥한 차림으로 쇼팽의
Grande Polonaise brillante를 연주한다. 지난 6년의 야수 같은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말이다. 아니 그는 그 지옥
같은 터널을 잊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결코 말하지 않지만 잊지는 않는다. 그 독일군 장교의 따뜻한 인간애를…
허지만 그는 동료 음악가의 말을 좇아 독일군 장교가
포로로 잡혀있던 현장까지 간다. '스필만을 만나면 도와달라'고 말한 그 독일군 장교는 이미 독일군 장교는 그곳에 없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내가 생의 극한 상황에 달한다면 나는 어떻게 처신을
할 것인가? 스필만의 솔직하고 담담한 심정이 내 마음에 다가온다. 나는 그보다 더한 방법으로 살고자 몸부림 쳤으리라.
바르샤바로 가는 기차.
내 마음속에는 오직 쇼팽의 음악을 연주하는 스필만의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가득 차 있다. 내일 아침 7시에는 바르샤바에 도착하리라.
* Copyright by
cha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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