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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잉카제국의 멸망과 정복자 피사로의 최후

찰라777 2006. 11. 28. 14:21

 

잉카제국의 멸망과 정복자 피사로의 최후

 

 

▲리마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정복자 피사로의 유체를 안치안 무덤

 

 

피사로의 유체가 안치된 대성당

 

쿠스코로 떠나기 위해서 다시 짐을 꾸린다. 짐을 꾸리다가 아내가 말한다. “지금 새로 시작되는 여행 길 같군요. 가방도 새 것이고, 안경도 새로 끼고… 호호.” 에고~ 다시 잊어버리지나 말지. 어쨌든 여유를 되찾고 웃는 아내의 얼굴이 밉지는 않다. 정말, 죽기 전에 세계 일주를 하고 싶다는 아내답다. 길을 가다가 죽어도 좋다는 아내의 여행 철학…

 

리마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우리는 아르마스 광장에 있는 관광 폴리스를 한 번 더 가보기로 했다. 가방을 뒤져 보아야 주사바늘과 약 밖에 없으니 도둑도 그 주사기를 보면 양심이 찔릴 거 아닌가? 그러나 혹시나 하고 기대를 했지만 역시나이다. “나타날 도둑이 아니오. 미안하오. 잊어버리고 나머지 여행이나 잘 하시오.” 마르틴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우릴 환송해 주었다. “마르틴, 당신 때문에 우리 다시 여행을 하게 되었소. 이 고마움을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마르틴과 헤어져 관광폴리스를 나왔으나 오후 2시 15분에 출발하는 버스시간까지는 아직 꽤 시간이 남아있다. 도둑 때문에 리마 구경은 못했으니 피사로의 유체가 누워있는 대성당이라도 자세히 좀 보고 가자.

 

▲정복자 피사로의 유체가 안치된 대성당. 피사로가 최초로 세웠음. 

 

잉카의 황금을 손에 넣기 위해 피사로가 직접 삽질을 하여 지었다는 대성당의 위용은 과연 대단하다. 대성당은 기공을 한 후 20년이 지난 1555년에 1단계 완성을 하고, 30년 후에 프란시스코 곤살레스 베르토란의 설계로 증축 한다. 그 후에도 대지진으로 여러 차례 손상되었으나 1755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된다.

 

성당 안에는 금과 은박, 조각으로 이루어진 16개의 제단이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역대 잉카의 초상화도 눈길을 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자신의 무덤을 파 놓은 거나 다름없었다. 황금에 눈이 어두워 너무 욕심을 내다가 부하의 비수에 쓰러지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삽질을 해 지었던 대성당의 입구 우측 코너의 유리 상자 안에 잠들어 있다. 페루 인들은 자신들을 멸망시킨 원수를 왜 아직까지도 성스러운 대성당 안에 안치하고 있을까?

 

 

▲화려한  대성당 내부의 위용. 잉카제국의 잉카들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무학에 문맹에 사생아였던 야심가 피사로

 

프란시스코 피사로. 그는 미천한 태생이었고, 사생아였다. 더욱이나 무학에 문맹이었다. 어려서는 돼지치기였고, 나이가 들어서는 용병으로 잔뼈가 굵은 사내였다. 용감한 사나이. 진짜 사나이.

 

야심과 용기로 똘똘 뭉친 사나이. 그는 그랬다. 그러나 그는 후세에 악의 대명사처럼 불리고 만다.

1511년, 파나마에 정착한 에스파냐인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파나마 지협으로 며칠만 더 항해하면 광대한 왕국, 이루 말할 수 없는 부유한 나라, 엘도라도에 닿는 다는 것이었다. 태평양을 발견한 에스파냐 탐험가  발보아가 여러 차례 가려고 시도했으나 라이벌 정복자 페드라리아스 다발라의 모함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고 만다.

 

▲피사로가 침투한 루트

 

 

1524년 피사로는 디에고 데 알마그로와 손을 잡고, 파나마 총독이 된 다빌라의 충고를 어기고 파나마 출신 사제 에르난도 데 루케의 후원을 얻어 두 척의 배를 빌려 1차 탐험에 나섰지만 모기떼에 시달리기만 했을 뿐, 별 성과를 얻지 못한다. 콜롬비아 해변에서 식인 부족을 발견한 그들은 공포에 휩싸여 항행를 포기하고 다시 파나마로 뱃머리를 돌리고 만다.

 

1526년 두 번째 탐험에 나선 피사로는 산후안 강 어귀에 정박하고 있는 동안 에콰도르 근처에서 그의 부하 루이사가 뗏목처럼 생긴 배 한척을 발견한다. 원주민들은 라마의 털로 짠 옷을 입고 있었으며 온 세상을 지배하는 ‘위대한 잉카’의 이름이 ‘우아이나 카팍’이라는 것도 알았다.

 

루이스의 보고를 들은 피사로는 산악지대에서 무력으로 그들을 제압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파나마로 증원군 요청을 보내는 한편, 동료들과 함께 탐험계획에 착수했다. 그런데 동료들은 길고도 힘든 기다림에 지쳐 있어 탐험을 포기하고 파나마로 돌아가지고 했다.

 

 

이슬라데가요의 13인

 

그러나 피사로의 결심은 화고했다. ‘황금으로 번쩍이는 나라’ 엘도라도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것. 의기소침해진 동료들 앞에서 파사로는 땅바닥에 선을 하나 그어 놓고 부하들을 다그친다.

 

“동지이자 친구인 여러분, 이쪽에는 가난과 굶주림, 고생, 억수 같은 비, 그리고 박탈이 기다리고 있다. 저쪽에는 쾌락이 있다. 이쪽에 서면 파나마와 가난으로 돌아간다. 저쪽에 서면 부자가 된다.”

 

동료 가운데 12명이 넘어왔다. 훗날, 그 선을 넘어선 자들이 원정의 선봉에 섰던 유명한 ‘이슬라델가요의 13인’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된다. 이들은 해안을 따라 드디어 원양항구인 툼베스에 도착한다. 그들이 원주민들의 환대를 받고 있는데 그 중 화려한 복장을 하고 구에 무거운 장식을 단 잉카의 사절 ‘오레혼(큰 귀를 가진 사람)’이 다가와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먼 땅에서 이곳까지 왔는가?”

 

이에 피사로는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즈 5세가 세상에서 제일 강력한 황제라고 말하며, 위대한 황제 믿는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려 왔다고 전한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우아이나 카팍에게 전령을 파견했다.

 

▲리마 대성당안의 정교한 조각품

 

 

그러나 피사로는 이 전력으로는 도저히 수십만의 군대가 있는 잉카제국을 정복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528년에 에스파냐로 돌아가 왕에게 후원을 요청한다. 마침내 그는 왕실의 원조로 준비를 갖추고, 1531년 세척의 배에 부하 180명, 말 27두를 싣고 에콰도를 툼베스 항구에 도달한다.

그러나 툼베스 항구는 과거의 활기찬 항구 대신, 전쟁과 질병으로 황폐해져 있었다.

 

1526년 백인들이 몰고 온 달갑지 않은 천연두가 퍼져 제국의 잉카 우아이나 카팍이 죽자, 후계를 둘러싸고 적자인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간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던 것. 그 결과 우아스카르는 쿠스코의 잉카로 봉해졌고, 아타우알파는 키토의 군주로 즉위하였다.

 

이 사실을 감지한 피사로는 툼베스를 벗어나 아타우알파가 있는 카하마르카로 향했다. 험준한 산맥이 고대 로마의 길과 비슷한 잉카의 길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며 해발 5000미터의 산악지대에 도달하였다. 매서운 추위가 그들을 덮쳤고, 말들은 병에 걸렸다. 그들은 돌로 만들어진 피라미드식 저장고에서 잉카의 군대가 몇 주간 사용할 수 있는 직물과 음식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고 산악의 급류는 밧줄을 타고 건너야 했다. 모든 건널목에는 물샐틈없이 감시되고 통행료를 내야만 통과를 할 수 있었다. 혼란한 북부 지역과는 달리 질서가 엄격하게 유지되고 강력한 문화가 깔려있었다. 피사로는 이 강력한 문화에 대항하려면 잔꾀를 부릴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잉카인들은 에스파냐인 들의 말과 화승총에 대한 공포심이 있었으나 곧 그 공포심에서 벗어났다.

 

 

"산티아고!"

그들은 전쟁수호신 성 야고보의 이름을 외치며 일제히 공격했다

 

툼베스에서 낯선 자들이 카하마르카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아타우알파는 혹시 이들이 전설 속에 나오는 비라코차(잉카신화에 나오는 창조주) 신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후에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그들은 난폭하고 잔인하며, 여자들을 밝히고 쉽게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그들이 신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들은 천둥, 번개 같은 무기를 가지고 굉장히 힘이 세다는 정보를 보면 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특사를 파견해 보고를 들은즉, 그들은 신이 아니라 200여명의 떼강도들로 추측되는 데, 재와 구슬을 구멍에 넣고 불을 붙이면 엄청난 소리와 함께 불을 뿜는 막대기와 고기를 잘라내는 데 탁월한 성능을 보이는 하얗고 반짝이는 기 꼬챙이와 거개한 말에 대해서 보고를 들었다. 이 보고를 들은 아타우알파는 별로 대단한 무리가 아니라는 파단을 내렸고, 카하라르카에 도착할 때까지 그대로 놔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침내 카하마르카 광장에 도착한 피사로는 잘 정돈 된 잉카의 주둔지를 보고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지만, 이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광장은 3면이 두꺼운 벽으로 막혀 있었고, 한쪽으로만 통하게 되어 있었다. 피사로는 인원이 적은 자신의 군대가 머물기에 적합하다고 판단을 내리고, 진을 치고 나서 동생 에르난도를 아타우알파에게 보내 자신의 진지를 방문해달라는 전갈을 보냈다.

 

에르난도가 처음 만난 잉카 아타우알파는 낮은 의자에 앉아 있고, 그 주위에는 고관들이 빽빽하데 둘러서 있고, 여러 명의 부인들이 보였다. 잉카는 정교하게 짠 직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왕권의 상징을 쓰고 있었다. 머리를 다섯 번 감은 뒤 이마를 덮은 모직 장식 끈이 바로 왕권의 상징이었다. 얼굴에는 아주 고운 베일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태양의 아들인 그를 인간이 직접 볼 수 없다는 상징이었다.

 

피사로의 방문 요청을 수락한 아타우알파는 그 동안 빼앗은 직물을 전부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다음 날 아침, 아타우알파는 첩자로부터 낯선 자들이 전투준비를 마쳤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그다지 노라지 않았다. 겨우 170명의 군사와 전투를 위해 무엇을 준비 한단 말인가?

 

그러나 피사로는 잉카를 사로잡을 치밀한 계획을 꾸몄다. 3면이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만 밖으로 열려 있어 전투가 시작되면 외부로부터 진입이 쉽지 않기 때문에 좁은 공간에서의 전투가 자신들에게 아주 유리 하다고 판단했다. 허지만 그는 겨우 170명의 군사로 수만 명의 잉카군과 대적해야 한다는 사실에 긴장과 초조함 속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피사로는 부하들에게 숨어 있다가 ‘산티아고(성 야곱, 에스파냐의 전쟁 수호성인. 전투를 벌이기 전에 이 이름을 외침)’라는 말이 떨어지는 즉시 돌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잉카 아타우알파의 최후와 잉카의 멸망

 

▲피사로 무덤의 벽에 있는 그림들 

 

다음 날, 결정적이니 만남이 이루어 졌다.
잉카의 행렬은 장관을 이루었다. 잉카는 앵무새의 깃털로 호사스럽게 장식한 가마에 올라탄 채 금으로 장식한 화려한 의상을 걸친 근위병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린 소년들이 잉카가 지나갈 땅을 조심조심 쓸었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가람들이 행렬 좌우에서 소라 고동과 피리를 불었다.

 

그러나 제국의 운명은 한 시간도 채 못 되어 완전히 기울어지고 말았다. 도미니크 신부인 빈센테 발베르데가 잉카 앞으로 나가 한 손으로 성호를 긋고 다른 손으로 성서를 내밀었다.

 

“나는 그대에게 신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 왔노라.”

 

에스파냐 인들은 언제나 ‘그리스도교 포교’라는 십자군적인 명분을 내 걸었던 것. 목적은 물론 금이지만… 아타우알파는 성서를 빼앗아 귀에 대보고는 땅 바닥에 던져 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저 바보 같은 이교도가 신의 책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크리스천이 되기를 거부했으니 그는 우리의 적이다. 내가 너희들의 죄를 사할 것이니 이교도들을 무찔러라!”

 

에스파냐 군들은 일제히 “산티아고!”를 외치며 돌격을 했고, 4문의 대포와 총들이 불을 뿜었다. 피사로는 아무도 감히 손을 댈 수없는 태양의 아들 잉카의 팔을 잡아 가마에서 끌어내렸다.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고, 시체가 널리기 시작했다. 에스파냐군의 칼에 맞아 죽는 숫자보다 놀란 군중들에게 밟혀 죽는 자가 더 많았다.

 

이제 광장에는 공포에 질린 원주민과 잉카만이 옷이 갈기갈기 찢겨진 채 팔이 묶여 이었다. 불과 두 시간 동안에 7천여 명의 잉카인이 죽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는 실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1532년 11월 16일 토요일 밤이었다. 이날은 잉카제국이 멸망하는 결정적인 날이다.

몸값으로 황금을 방에 가득 채웠으나…

 

포로로 잡힌 아타우알파는 그런 와중에서도 자신을 죽이지 낳는 이들을 보고 빠져나가 복수를 할 궁리를 하였다. 그는 목숨을 살려주면 왕궁의 방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황금을 채워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좀 어리둥절했지만 피사로는 즉시 서기를 불러 이 약속을 문서로 작성하게 했다. 아타우알파도 피사로도 글을 몰랐지만… 그 방은 가로 6.7미터, 세로 5.2미터로 현재 카하마르카에 있는 ‘몸값의 방’안에 그러져 있는 선의 높이는 2.8미터로 아타우알파가 손을 뻗어 닿은 높이라고 한다.

 

잉카의 몸값으로 곧바로 해안지방, 산악지방 등 사방에서 금이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몸값이 다 거두어지자 피사로는 금의 1/5은 에스파냐 국왕의 몫으로 남겨두고, 자신의 몫을 제외한 나머지를 부하들에게 나우어 주었다. 피사로와 그의 병사들이 그렇게 빨리 부유해진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타우알파는 그렇게 빨리 그만한 재물을 날린 겨우도 없을 것이다. 그것도 단 한 번의 주사위를 잘못 던진 바람에….

 

그러나 아타우알파는 곧 자신이 자유의 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다른 정복자 알마그로가 150명의 군대와 59두의 말을 이끌고 피사로와 합류했고, 자신을 구하리라 생각했던 잉카군 사령관인 찰구치마가 피사로의 동생 에르난도의 농간이 속아 스스로 아타우알파를 찾아와서 피사로의 포로가 되어 버렸던 것.

 

피사로는 아타우알파에게 충성하는 장군들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타우알파를 대역죄라는 죄목으로 화형을 선고 한다. 화형은 잉카인들에게는 가장 잔인한 처벌이었다. 잉카인들은 육체가 없어지는 화장에 대한 극도의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타우알파는 화형대신 목이 잘린다는 조건으로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기로 했다. 아타우알파는 만약 목이 잘린다면 언젠가 살아나서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고 맹세했다. 지금도 페루 산악지방에는 머리가 땅 밑에서 솟아나는 잉카리(일종의 메시아)가 돌아올 날이 임박했다는 신화가 전해지고 있다.

 

아타우알파가 처형되던 날, 하늘이 어두워졌다. 그의 아내 몇 명과 누이는 내세에서 그를 섬기기 위해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군주의 죽음을 따르는 자살은 북부 안데스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풍습이었다.

 

 

정복자 피사로의 최후

 

 

▲피사로 무덤에 새겨진 글

 

아타우알파를 죽인 피사로는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로 진격했다. 1533년 11월 15일, 드디어 피사로는 쿠스코를 점령했다. 그는 그가 내세운 꼭두각시 망코 잉카의 협력아래 쿠스코 시내와 그 주위의 모든 신전, 무덤, 그리고 원주민에게서 금, 은, 보석을 거둬들였다. 모든 금과 은은 녹여서 금괴로 만들어 졌고, 금이 아닌 모든 것을 파괴했다.

 

피사로는 이 대성당을 주축으로 리마를 건설한 다음 약탈한 잉카의 황금을 가차 없이 녹여 5분의 1일은 에스파냐 왕실에 보내고 나머지는 거의 자신이 챙겼다. 피사로의 황금 배분에 항상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는 알마그로는 피사로를 제거할 앙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알마그로는 오히려 피사로의 손에 죽고 만다.

 

알마그로가 죽은 다음 푸대접만 받고 있던 알마그로의 아들을 중심으로 한 알마그로파 세력들은 알마그로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 걸고 리마를 습격하여 피사로의 등에 비수를 꼽는다. 그렇게 야심 많던 피사로도 끝내 동료의 비수를 맞아 암살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 알마그로의 아들은 또 다시 피사로의 동생에게 완전 전멸당하고…. 동료끼리 죽이고 죽이는 참상이다. 세상은 언제가지나 적과의 동침이이루어 질것인가?

 

“그런데 왜 페루 사람들은 그의 사체를 이처럼 고이 모시고 있지요?”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거지?”

 

유리 상자 안에 고이 간직한 피사로의 유체. 거기에 대성당의 건너편에는 피사로가 말을 탄 동상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는 역사를 청산한다고 ‘구조선 총독부’의 건물까지 날려 보내 버렸는데....

 

총독부 건물을 파괴한다고 역사가 청산될까? 일제가 지은 건물은 총도부 말고 한국은행, 철도, 항마느 도로 등 엄청나게 많다. 그런 논리라면 이 모든 것들을 파괴해야 맞지 않는가. 파괴는 파괴를 불러온다.  오히려 그대로 두고 후세인들에게 역사의 교훈으로 깊이 새겨두는 게 더 낳지 않을까?

 

※참고문헌 : '잉카 태양신의 후예들'(시공 디스커버리 총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