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방랑/108일간의세계일주

[러시아19]눈 내리는 날의 이별

찰라777 2005. 9. 13. 16:24

 
▲ 모스크바로 가기위해 나타샤의 아파트를 나서며.

이별의 날에 하얗게 내리는 눈이 더욱 아쉬움을 남기게 한다.

 


눈 내리는 날의 이별

-페테르부르크를 떠나며



서울의 집을 떠나 온지 벌써 한달이 다 되어 간다. 암스테르담에서 시작된 기차여행. 기차를 타고 북유럽을 거쳐 스톡홀름에서 바이킹 호를 타고 헬싱키로 건너와 다시 헬싱키에서 기차를 타고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왔던 것.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며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한 우리는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를 타기위해 나타샤의 집을 나섰다. 그런데 오늘 아침부터 눈이 하얗게 내렸다. 나타샤와 박진우 군이 우리들의 작은 가방을 들고 버스정류장까지 환송을 나와 주었다.

“모스크바 스카야 역에서 내리셔야 합니다.”
“모스크바 스카야. 알겠습니다. 그 동안 너무 고마웠습니다.”
“여행 무사히 잘 하시고 세계일주가 끝나면 사모님의 병이 완전히 나으실 거예요. 두 분을 위해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에 오시면 꼭 전화를 하셔야 합니다.”

나타샤는 아쉬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이별의 인사를 한다.

“홀홀 단신으로, 더구나 아픈 사모님과 함께 여행을 다시시는 최 선생님을 보면서 유학을 떠나온 저 역시 많은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고맙소. 박 군도 건강하시고 뜻하는바 이루길 바랍니다.”

 

눈 내리는 날의 이별. 추은 날씨다. 나타샤의 입에 하얀 입김이 서린디. 정들었던 나타샤도 나탸샤의 아파트도 시계에서 사라져 간다.

멀어져 가는 나탸샤를 바라보며 나는 다시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가 떠 오른다.

 

"...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중에서)" 

 

▶토끼섬에 있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성당

 

 

아무리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가는 나그네라고 하지만 이별의 순간은 언제나 가슴 뭉클하다. 우리를 태운 147번 버스는 거리를 빙빙 돌더니 네온사인이 휘황하게 비추이는 네바강을 지나간다. 토끼섬의 조명이 화려하게 네바 강을 수놓고 있다.

“그 동안 우리들이 머물렀던 무대를 지나가는 군요.”
“찬란하면서도 우울한 도시야. 뭔가를 생각게 하는 그런 도시….”

네바 강이 도도히 흐르는 페테르부르크는 그 찬란한 문화와 역사가 강열한 인상을 심어주면서도 무언가 우수를 느끼게 하는 분위기다. 사람들의 표정이 그렇고 회색빛 하늘이 그렇다. 그러나 거리의 벤치와 지하철, 버스에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는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러시아의 희망을 본다. 우울한 희망.

멀리 이삭 성당이 조명을 받으며 그림처럼 다가온다. 화려한 네프스키 대로를 지나 바티칸 궁전을 방불케 하는 카잔 성당의 회랑을 지난다. 피의 사원이 운하 속에 신비한 모습으로 그림자를 그리며 밤하늘에 서 있다.


 


▲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모스크바역. 러시아는 도착지 이름을 출발지 역이름으로 사용한다.

 


“모스크바스키 바그잘.(모스크바 역입니다)”

차장이 모스크바 역에 다 왔으니 내리라는 신호다. 좀더 미리 알려 줄 일이지. 배낭을 서둘러 메고 거리에 내리니 방향 감각이 없다. 길을 걷는 여인에게 포스트잇에 적혀진 발음을 더듬거리며 읽으면서 모스크바 역을 물어본다.

“모스크스키 바그잘 그제?(모스크바 역이 어디지요?)”
“바로 저기에요.”

러시아에서는 가급적 여인에게 길을 묻는 게 좋다. 아니면 옷을 잘 차려 입은 신사에게 묻거나. 갱을 한번 만난 본 나로서는 주의를 게을리 할 수가 없다. 모스크바 역 광장으로 들어가니 넓은 광장 한 가운데 동상이 서 있다.

 

 


▲ 승객들로 붐비는 모스크바 역 광장의 모습. 가운데 동상이 인상적이다.

 

 

페테르부르크에서 목포까지... 기차여행을 꿈꾸며


서울에는 ‘서울역’이 있고 목포에는 ‘목포역 ’이 있지만, 페테르부르크에는 ‘페테르부르크 역’이 없고, 또한 모스크바에는 ‘모스크바 역’이 없다. 러시아는 도착지의 이름을 출발지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모스크바로 가려면 ‘모스크바 역’에서 기차를 타야 한다. 헬싱키에서 기차를 타고 페테르부르크에 내린 역은 ‘핀란드 역’이었다.

기차 여행은 추억을 되살린다. 기차에 오르니 내가 6년 동안 기차를 타고 학교를 다녔던 고향산천이 떠오른다. 그 기차 길에는 시와 낭만과 소년의 꿈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꿈이 지금 아내와 함께 기차를 타고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었을까?

 


▲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며. 모스크바 역에서 기차를 타기전에...

 

레닌은 10월 혁명의 완수를 위해 기차를 타고 핀란드 역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이 기차를 타고 거꾸로 시베리아 철도를 횡단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지나 평양, 서울, 그리고 내 고향인 목포까지 가 보겠다는 희망을 그려본다.

“여보, 먼 훗날 다시 이곳에 온다면 페테르부르크에서 기차를 타고 내 고향 목포까지 갈 날이 있겠지?”
“우리 생애에 그런 날이 올까요?”

20대도 아닌, 실버세대에 가까워진 50대인 주제에 무거운 배낭을 걸머진 우리부부는 세계일주 여행이 채 끝기도 전에 시베리아 열차횡단 여행 꿈을 꾸고 있으니 과연 우리 부부는 여행광인 모양이다.

 

꿈은 계속 꾸다가 보면 이루어진다. 언젠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라라의 테마’가 흐르는 ‘닥터 지바고’의 노보시비르스크 역을 지나 고향 역으로 갈 날이 있으리라. 드디어 기차가 움직인다. 그 날이 올 때까지 페테르부르크여 안녕!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