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 포인트 찰리"에서
‘체크 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 낙서로 점철된 베를린 장벽을 지나 체크포인트 찰리에 서있는 기분이 묘하다. 우리나라가 남북이 분단된 이후
군사정전회의를 주제하는 판문점에 서 있는 분위기다. 체크포인트 찰리와 판문점. 한쪽은 냉전의 벽이 무너졌지만 우린 아직도 냉전의 기류가 흐르고
있는 판문점으로 가로막혀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뒤 베를린 서쪽과 동쪽을 왕래하는 외국인들은 미군 검문소 체크포인트
찰리를 지나야 했다. 이 검문소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동베를린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상징하는 곳. 많은 사람들이 이
검문소를 몰래 통과해 동베를린을 빠져나왔고, 때로는 동독 국경수비대에 들켜서 붙잡히거나 총에 맞아 숨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 냉전 당시의 체크포인트 찰리.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헐려서 없어졌지만, 근처에 “체크 포인트 찰리 박물관”이 남아 그때의 일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베를린 장벽이 낳은 갖가지 비극과
동독 국경수비대의 만행을 자료로 모아 전시한 곳인데, 동베를린 사람들의 탈출을 돕겠다는 사람들이 이 박물관에 모여 계획을 짜기도 했으며,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은 이 박물관에 와서 기쁨을 나누고 서독에서 새롭게 살아갈 방법을 찾기도 했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 박물관은
라이너 힐데브란트 (Rainer Hildebrandt)씨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그는 2004년에 90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그의
미망인 알렉산드리아 힐데브란트씨가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녀에 의하면 남편은 2차대전 중에 나치에 저항하다 붙잡혀서 수용소에
일년 반 동안 갇혀 있었는데, 감옥에 있는 동안 남편은 나치독재정권과 맞서 싸우겠다는 마음을 더 굳게 먹었다는 것.
-전망대에서 바라본 베를린
시가지
전쟁이 끝나고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남편은 동독
독재정권과 싸우기 위해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한 끝에 이 박물관을 세울 것을 결심하였는데, 동독정권의 만행이 저질러지는 곳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체크포인트 찰리 근처에 방 두 칸을 빌려서 박물관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선 박물관에 들어선 순가 가슴이 찡하게
울려온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탈출하는 처절한 한 탈출 극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클로즈 업 되어온다. 이 많은 자료를 한 개인이 수집하여 전시를
했다는 것도 놀랍다.
예를 들어 ‘이제타’라는 소형 자동차는 차 앞 뚜껑 밑을 개조해서 사람을 몰래 숨길 수 있게 했고, 또 두
가족이 함께 만들었다는 열기구 풍선도 있고, 모터를 달아서 날수 있게 만든 커다란 연도 있다. 동독의 기계기술자가 바다를 통해 탈출할 때 썼다는
소형 잠수정도 관람객들의 눈길을 끈다. 그 밖에 하수도, 철책, 1인용 경비행기 등을 이용해 탈출한 800여명의 탈출기록은 가슴을 저미게 한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철거될 때까지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 장벽을 넘어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5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동독 경비대에 발각돼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보다 더 많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베를린 장벽에서 경비대의 총에 맞아
숨진 사람들은 2백 여 명으로 확인되고 있지만, 정확한 숫자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은 독일이 통일된 후 베를린의
관광명소로 자리 잡으면서 한해에 60만 명 이상이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동독 난민들이 탈출할 때 실제로 썼던 각종 기발한 장비들이 전시돼
있어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 앞에는 어른 키 높이의 십자가 1천65개가 서있는데, 이 십자가들은 동독을
탈출하다가 희생된 넋들을 기리고 있다. 십자가마다 희생자들의 사진과 신상을 적은 글이 걸려있다.
박물관에서 나온 나는 다시 체크
포인트 찰리에 섰다. 지금은 마치 복권을 파는 간이 점포처럼 모래주머니를 쌓아 올린 토치카 앞에 볼품없이 남아있지만 이 검문소 하나가 30년
동안 동과 서를 가로 막고 있었다니 감회가 사뭇 깊다.
오늘따라 날씨조차 을씨년스럽다. 지구상에 단 하나뿐인 분단국가에서 온
나그네의 마음에는 와락 눈물이라도 날것만 같은 어떤 치밀어 오름이 가슴을 떨리게 한다. 하늘도 내 마음을 알았을까? 때마침 내가 방문한 절기도
장벽이 무너지던 늦가을이다. 잔뜩 흐려진 먹구름 속에서 통한의 눈물 같은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으니…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동독 공산당 정치국원인 ‘권터 샤보브스키’의 긴급기자회견 실수로 체크 포인트 찰리가 시간대를 앞당겨 열렸던 해프닝 기사다.
이 기사를 보면 동독인들이 얼마나 자유를 갈구했으며, 그 당시의 긴박한 사태를 엿볼 수 있다. 우리도 남북이 통일이 되어 휴전선이 무너지는 날
이런 해프닝이 일어날까?
11월 9일 저녁 7시. 동독 공산당(SED) 정치국원이자 선전 담당 비서인 귄터 샤보브스키의 긴급
기자회견을 방송을 통해 듣고 있던 동독 국민들은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동독 국민들은 모든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다. 이게 정말인가. '모든 국경을 넘어'라면 서독으로의 여행도 포함된다는 말
아닌가. 더구나 '지금 이 순간부터'라니…. 시민들은 '체크 포인트 찰리'를 비롯해 서 베를린으로 통하는 검문소로 밀물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장벽을 열어라". 시민들은 외쳤다. 초소 경비병들은 우왕좌왕했다. 상부로부터 아무 지시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을 열 것인가, 발포할
것인가. 흥분과 긴장이 팽팽히 교차했다
같은 시각, 서독도 흥분의 도가니였다. 본의 연방하원에서는 여야 의원들이 본회의 도중
동독의 국경 개방 소식이 전해지자 회의를 중단하고 독일 국가를 합창했다. 서 베를린 시민들은 장벽으로 달려갔다. 베를린 장벽 검문소에서
경비병들과 대치하고 있던 동베를린 시민들은 힘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자칫 유혈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경비대는
여전히 상부로부터 명백한 대응 조치를 지시받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이날 샤보브스키가 국경 개방의 시점을 '지금부터'라고
발표한 것은 '실수'였다. 공산당 정치국은 이때까지 국경 개방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세를 되돌리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장벽을 돌파하려는 시민들에게 발포한다면 그것은 곧 파국임이 너무나 명백해 보였다.
밤 10시쯤 마침내 동베를린
시민들은 검문소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서쪽에서는 샴페인 폭죽이 이들을 맞았다. 환호와 눈물, 격렬한 포옹…. '베를린 장벽 붕괴'의 세기적
뉴스가 전 세계로 타전됐다.
“당신 왜 그렇게 멍하게 서 있지요? 비도
내리는데 빨리 가요!” “어? 그렇군. 어디 카페라도 들어 비를 피해야겠군.…”
폭격으로 부서진 카이저 빌헬름 교회, 동서
분단의 기점 브란덴부르크의 문, 무너진 베를린 장벽, 그리고 동서 냉전시대의 관문 체크포인트 찰리… 베를린에 머무른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역사의 현장들은 우리에게 왠지 낯설지만은 않는 그런 장소들이다.
슈프레 강에는 물안개가 자욱이 끼어 냉전 당시의 암울했던
분위기를 연출이라도 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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