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소로에서 길을 잃다
푸른집 22번지,
카프카의 집
“꼭 옛 신림동 달동네 언덕
같군요.” “난 개발 되기 전 시흥동 산동네 같은데…”
"아, 저 아래 빨간 집들... 너무
예뻐요"
프라하의 황금소로(Zlata Ulicka)는 좁고, 예쁘고, 아담하다. 그래서 ‘그림 같은 거리’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도 모른다.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그런 골목과 집들이 언덕에 빼꼭히 들어 차 있는 황금소로. 이는 한 때 내가 살았던 시흥동의 다닥다닥
붙어있는 산동네를 연상케 한다.
시흥동 산동네는 관악산의 한 줄기인 삼성산 암벽 밑에 있다. 그 산동네를 지나 나는 해태바위로
이어지는 암벽을 타고 산에 오르곤 했는데, 호압사에서 바라보는 해태바위 절벽은 하나의 자연적인 성처럼 느껴지곤 했었다.
작은 집들이 모여 마치 하나의 성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프라하의 황금소로와 시흥동 산동네가 유사한 모습이다. 그것은 정제되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지금 시흥 산동네는 아파트라는 또
다른 성이 빼꼭히 들어서 있다.
우리는 점점 황금소로의 매력에 빨려
들어간다. 아니, 프라하의 매력 속으로 용해되어간다. 작은 가게, 계단에 늘어선 노점상, 예쁘게 가꾼 집들, 그리고 골목을 붐비는 서민적인
사람들 속에서 세상의 사람들 냄새를 물씬 맡아본다는 것! 여행은 역시 사람들 구경이다. 아내는 가게마다 기웃거리느라고 정황이 없다. 예쁘단다.
뭔가 사고 싶겠지.
황금소로는 원래 프라하성에서 일을 하는 집사나 하인들이 살았다는 곳인데, 연금술사들이 차츰 모여 들면서
‘황금소로(Golden Lane)'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 성벽의 아치에 붙박이로 지어진 집들은 성의 수비대원들 숙소였는데, 후에
연금술사들이 이주해와 건물을 개축해 사용했다.
그 후 프라하의 빈민과 범죄자들이 모여 사는
빈민가로 전락했으나, 지금은 본래의 모습보다 미화시켜 복원을 해 놓은 상태로 늘 관광객이 들끓고 있다. 이곳에서도 여러분은 바바리 깃을 세우고
우수에 찬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십중팔구 소매치기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푸른집 22번지, 카프카의 집에는 언제나 많은
인파가...
“저 파란 집은 왜 사람들이 저렇게
많지요?” “아마 맛있는 카푸치노를 파는 집인 모양이지.” “찻집은 아닌 거 같은데요?” “사실은 프란츠 카프카가 살았던
집이야.” “알면서도 날 놀리려고 카푸치노 찻집이라고 했지요?” “카프카와 카푸치노가 어쩐지 다 정감이 오는 말이지 않은가?
하하.” “이이가…”
그러나 카프카와 카푸치노는 둘 다 내게 정감이 가는 단어다. 카프카의 삶은 카푸치노에 흘러내리는 하얀
거품만큼이나 덧없고, 몽상적인 삶이 아니던가. 41세의 짧은 생애는 순간에 부풀어졌다가 사라지는 카푸치노의 거품 같지만, 그 거품 아래 따스하게
혀와 후각을 안아주는 카푸치노의 맛과 같은 삶을 살다간 사람….
황금소로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프란츠 카프카가 한동안 이곳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다. 카프카는 한 때 일생동안 가장 총애를 했던 막내 여동생 오틀라(Ottla)의 집에서 살았다. 그는 이 언덕을
오르내리며 프라하성으로 걸어갔겠지. 소설 성(城)을 구상하면서.... 푸른색 벽에 ‘22번지’라는 표시와 ‘카프카가 살았던 집’이라는 동판이
붙어있는 곳이 바로 그 집이다. 지금은 카프카 관련 책과 기념품을 팔고 있다.
황금소로에서 길을 잃다
카프카는 프라하를 그의 ‘어머니’라고 했다.
복잡하고 폭력적인 세태에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프라하에서 살았던 그의 작품은 황금소로의 복잡한 길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하다.
볼타강의 안개만큼이나 베일 속에 가린 꿈속에서 카프카는 살아왔지 않았을까? ‘카프카의 작품세계는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짓을 정확히 흉내 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놀이를 비웃고
있다'고 한 토마스 만의 서평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는 수많은 여인들과의 교류, 약혼, 파혼, 기혼녀와의 비극적인
사랑과 더불어 인생의 실패와 방황 속에서도 ‘변신’을 꿈꾸며 유혹의 도시 프라하에서 살아간다. 죽기 직전에 짧은 요양원 생활을 제외하고는 고향
프라하를 떠나지 못했던 카프카. 그는 이 도시 어디엔가 유혹의 발톱과 함께 떠도는 환각에 취해 방황하면서도 또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변신’을 갈망했을까?
▲ 카프카의 연인들. 카프카는 실연, 파혼 등 가정은
불행했다.
위로부터 Dare Diamant, Felice Bauer, Hedwig
Welier, Milena
카프카는 그가 죽은 후에 성(城), 변신, 심판, 실종자
등의 연속 출판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카프카는 유서를 통해 ‘자신의 모든 작품을 출판하지 말고 소각해 달라’는 부탁을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한다.
그러나 카프카의 유서를 읽은 막스 브로트는
‘미안하네, 카프카! 하지만 약속은 지킬 수 없다네.’ 그 후 카프카의 대무분의 작품은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에 의해 출판을 한다. 만약
브로트라는 친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카프카라는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이거,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하지
못하겠네.” “사람들에게 물어봐요.”
▲ 카프카가 직접그린 그림
황금소로의 좁은 골목을 오르내리다 우린 그만
출구로 나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프라하에서 길을 잃어버린 동양의 나그네. 볼타강으로 나가는 출구를 물어물어 겨우 거미줄 같은 황금소로를
빠져 나왔다.
출구가 없는 마을, 창문이 없는 작은 집들.
카프카는 출구가 없는 방에서 마음의 창을 열었으리라. 마치 고흐가 출구가 없는 밀밭에서 권총자살로 마음의 숨통을 터뜨렸듯이…
‘고독하게 혼자 살면서도 때로는 어디엔가 관계를 갖고 싶어 하는 자, 하루 시간의 변화나
날씨의 변화, 직업 관계의 변화 또는 그와 같은 것들을 참작해서 그저 매달릴 수 있는 어떤 팔이라도 보고 싶어 하는 자는 골목길로 난 창문
없이는 도저히 오래 견디어내지 못할 것이다.
(카프카의
‘골목길로 난 창’에서)
* 참고자료 :프란츠, 연인들 사진과 그림 http://kafka-franz.com
* 다음편에서는 프라하에 남아있는 카프카의 흔적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 Copyright by
cha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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