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루미 부다페스트
▲부다페스트를 가로지르고 있는 두나
강
늦가을 부다페스트의 하늘은 여전히 짙은
회색이다. 가을비가 축축이 내린 두나 강변은 초겨울처럼 춥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분다. 낙엽이 바람에 뒹굴며 굴러간다. 천년고도 부다페스트.
어쩐지 도시의 이름에서 오는 느낌도 으스스해 보인다. 하필이면 그 무서운 페스트란 이름을 붙였을까? 중세기에 유럽인구의 3분의 1인 2천
500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병이 바로 흑사병이 아니던가.
▲어부의 요새
오늘 아침 우리가 올라온 ‘어부의 요새’는 ‘부다’지구에 있다.
부다는 어쩐지 극락을 연상케 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어부의 요새에서 바라본 두나 강(헝가리에서는 도나우 강을 두나 강이라 부른다)역시 짙은
회색이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이 아니라 ‘어둡고 칙칙한 도나우 강’이다. 허지만 어부의 요새에서 바라본 두나 강은 우울한 아름다움이
한층 빛나게 보인다.
▲회색하늘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두나 강은 우울한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어부의 요새에는 고깔을 뒤집어 쓴 듯한 7개의 하얀 탑이 회색 하늘을
찌르고 있다. 수천 년 전 헝가리를 건국한 일곱 명의 마자르 족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19세기에는 어부들이 이곳에서 적의 침입을 막았다고 하여
어부의 요새란 이름이 붙었다. 두나 강을 사이에 두고 뾰쪽한 첨탑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아까부터 어부의 요새 한 모퉁이에서는 한 집시가 바이올린으로 ‘헝가리 무곡’을 연주하고 있다.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곡조가 더욱
구슬프게 들린다. 하늘을 지어 짤 듯 애잔한 음악이 가슴팍을 파고들더니 기어코 회색 하늘에서 빗방울을 뿌리게 한다.
▲ 마챠시 교회
그렇지 않아도 도시 전체에 흐르는 느낌이 우수에 젖어있는 듯한데,
집시가 연주하는 헝가리 무곡과 차가운 가을비는 우울한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한다. 조각처럼 정교하게 세워진 마챠시 교회의 첨탑도 우울한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페스트에서 해방된 것을 감사하기 위하여 세웠다는 삼위일체상은 한편의 조각품이다.
이 왕궁 언덕에는 멋진
중세풍의 건물들이 다 몰려있다. 아무리 걸어도 싫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거리다. 두나 강을 배경으로 들어서 있는 아치형의 성벽과 중세기의
고풍스런 건물들은 카메라를 들이대기만 해도 한 편의 아름다운 엽서를 만들 수 있다. 부다왕궁과 국립미술관 그리고 도나 강을 따라 늘어서 있는
색색의 지붕들은 한 폭의 그림이다.
춥다. 마챠시 성당 맞은편에 있는 와인하우스에 들려 공짜로 나누워 주는 헝가리언 와인에 입술을
적신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와인을 맛보다 보니 가슴이 뜨거워진다. 헝가리와인이 이렇게 유명한 줄은 또 예전에 미처 몰랐던
일….
▲왕궁언덕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
“난 얼큰한 찌개에 김치가 먹고 싶어요.” “이 근방 어디에
한국인 음식점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마 수첩에 전화번호가 있을지…”
하기야 날씨는 춥고 한국음식을 먹은 지도 오래 되었으니 이런
날은 따끈한 김치찌개 생각이 절로 날개다. 수첩을 뒤져 보니 마침 ‘서울의 집’이란 한국요리점이 케이블카 근방에 있다고 적혀 있다. 공중전화를
찾아서 전화를 하니 오늘은 쉬는 날이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세체니 다리에서 두나 강물을 내려다 보니 아찔 하기만 하다.
우울한 날은....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세체니 란츠히드 다리를 걸어본다. 두나 강을
가로지르는 8개의 다리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다리. 네 마리의 사자상이 다리 양쪽 입구에 으르렁 거리듯 입구를 지키고 있다. 난간을 잡고
강물을 내려다보니 아찔하다. 공짜 포도주에 취한 탓인가.
나는 그 아찔함 속에서
갑자기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한 장면을 본다. 영화 속에서 이 다리는 항상 죽음의 모티브와 연결되곤 했다. 극중에서 일로나에게 청혼한 뒤
한스가 이 다리에서 투신자살을 시도 했고, 안드라스는 자신이 작곡한 노래 때문에 자살한 사람들을 떠올린 뒤 망연자실하여 강을 내려다 보다 자살의
유혹을 느낀다. 그가 작곡한 노래 한곡 때문에 8주 동안에 187명이 연쇄 자살을 하다니…. 더욱 아이러니 한 것은 이 곡을 실제로 작곡한
헝가리의 피아니스트인 레조 세레스도 ‘글루미 선데이’를 틀어 놓은 채 자살을 하고 말았다는 것.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한 장면. 세체니
다리에서...
그러니 우울할 때는 강을 조심해야 한다. 인생에서 한 순간의 괴로움
참지 못해 사람들은 삶 전체의 시간을 강물에 집어던져 버리고 싶을 때가 있으니 말이다. 우울할 때 다리를 건너는 사람에겐 소리 없이 흐르는
회색의 강물이 당신에게 갑자기 묘한 말을 걸어온다. 이크! 빨리 지나가자. 강물을 내려다보는 아내의 손을 낚아 채 듯이 잡고 스산한 바람이
불어재끼는 세체니 다리를 바삐 걸어 나온다.
▲우수에 젖은 두나강은 말이 없다.
강물이 역류할 수 없듯이, 시간을 바꿀 수 없을 때 여행은 더욱
소중해진다. 지금 세체니 다리를 걷는 우리에겐 시간을 바꿀 수 없는 순간 속에 있다. 여행으로 얻어진 공간에서 세체니 다리에 선 이방인의 사랑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 이성간의 사랑이 아닌, 어떤 모성과도 같은 영속한 사랑이다.
남자는 때로는
이성적으로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때 그녀와 오랜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 이성간 성애의 사랑은 용광로처럼 달아오르다가 어느 순간 지옥처럼
괴로움으로 변하지 않던가. 이성간 성애의 사랑이 없다면 그 행복 또한 건조하고 무의미해지고 말겠지만….
▲보행자의 천국
'바치거리'. 일로나와 안드라스가 함께 있었던 카페는 어디에...
하여간, 세체니 다리를 건너온 우리는 주린 배도 채울 겸 ‘바치거리’로
갔다. 바치거리는 차량통행이 금지된 보행자와 쇼핑의 천국이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는 쇼윈도와 카페에서 내뿜는 불빛으로 채워져 있다. 사람들이
거리를 서성거리고 있다. 거리의 카페에 들려 뜨거운 스프와 빵을 시킨다. 뜨거운 스프에 빵을 찍어 먹는 순간은 살아 숨 쉬는 행복한 삶의 한
현장이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들렸다는 그 유명하고 비싼 ‘군델’레스토랑이 아니더라도…. 군델 레스토랑은 영화 글루미 선데이를 촬영한 장소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데, 때문에 음식값이 무지 비싸다. 영웅광장 근처에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배낭여행자에겐 그림의
떡이다.
▲뜨거운 스프에 빵을 찍어먹는
맛....
군델식당의 음식이 아무리 맛이 있더라도 기즘 우리가 먹는 뜨거운
스프에 비하랴!스프와 빵으로 배를 채운 우리는 다시 밤의 두나 강과 왕궁언덕을 한 번 더 보려나갔다. 밤의 두나 강은 낮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낮에 드리워진 회색의 휘장은 간곳이 없고 온통 휘황한 불빛으로 채워져 있다. 어두운 밤하늘에 현란한 불빛으로 치장한 왕궁과 교회, 중세기의
건물들이 그림처럼 두나 강에 비추고 있다. 던지럽게 아름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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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두나강과 왕궁언덕은 너무나
아름다워!
밤의 강물은 아름다워! 그러나 밤의 아름다움도 강물은 조심을 해야
한다. 여긴 글루미 선데이의 무대가 아닌가. 아름다운 세체니 다리를 한번만 더 걸어보자는 아내. 그렇다고 남자 밤의 강물을 무서워해서 이
아름다운 밤의 다리를 걷지 못하는 것도 팔불출이 아니겠는가? 세체니 다리를 건너온 우리는 바로 전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런데 앗, 불사!
오늘의 여행을 메모를 하려고 하는데 수첩이 없다. 아마 그 공중전화 박스에 두고 온 게 틀림없다.
내일 아침 일찍 기차로 부다페스트를 떠나야 하는데…. 그 수첩엔
서울을 출발하여 지금까지 무려 두 달 동안이나 여행을 한 일기들이 빼꼭히 기록해 놓았던, 나에게는 매우 귀중한 물건이다.
늦었지만 그 공중전화 박스에 다녀와야겠어. 혼자 다녀 올 테니 당신은 호텔이
그냥 있으라고. 지하철을 타고 다시 어부의 요새에 올라 공중전화 박스를 찾아갔지만 수첩은 없다. 덕분에 부다페스트의 범 풍경은 실컷 구경했지만
호텔로 돌아오는 기분은 허탈하다. 음, 잊어버리자. 어차피 인생은 마음속에 남은 것들만 기억하면 되니까.
그러나 다음날 아침
부다페스트를 떠나는 마음은 그리 가볍지가 않다. 마치 ‘글루미 선데이’란 분위기에 감금 되었다가 풀려나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여전히 하늘은
회색빛이다. 일요일이 아니고 월요일이기에 다행이군.....^^*
■ 부다페스트 거리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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