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방랑/108일간의세계일주

[142]돈키호테의 '부러진 창'

찰라777 2006. 10. 11. 11:16

 

 

 

12시 45분에 뮌헨 공항을 이륙한 이베리아 항공3539 비행기. 여기저기서 스페인어가 들려오고, 가벼운 라틴풍의 음악이 흥겹게 들려온다. 오후 3시 20분. 비행기는 마드리드 바라하스Barajas 공항에 가볍게 착륙을 한다. 아내와 내가 두 번째로 밟는 스페인 땅이다.

 

5년 전 11월 어느 날, 우리는 ‘유럽의 꽃’이라 불리는 바르셀로나에서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스페인의 모든 길은 마드리드로 통한다. 11월의 맑은 햇살이 파란 하늘에 수은처럼 반짝이는 마드리드의 거리는 우리를 매혹하기에 충분했다.

 

 

 ‘해가 지는 일이 없다’던, 무적 강국 스페인!
투우Fiesta와 플라멩코Flamenco의 나라.


스페인은 내 머리 속에 그렇게 각인되어 있다. 투우사의 칼을 맞고 붉은 선혈을 토하며 쓰러지는 황소. 아, 황소는 투우사의 간교한 칼을 받기 위해 숙명적인 아픔을 그렇게 키워 왔던가? 스페인은 해마다 수많은 황소들이 간교한 투우사들의 칼날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간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피를 보고 열광을 한다.

 

밤을 잊게 하는 플라멩코의 유혹은 또 어떠한가? 집시의 한恨을 담은 플라멩코에 취해 와인 잔을 기울이며 밤이 가는 줄 모르고 지샜던 뒷골목의 밤무대. 춤추는 집시의 치마폭에서 너풀거리며 흘러나오는 애절한 노래 가락, 간장을 끊어내는 듯 파동 치는 기타소리, 탬버린, 캐스터네츠(castanets)의 단백한 율동… 거기에 다듬이 방망이 소리처럼 박력이 넘치는 집시의 스텝과 열광적인 박수소리…

 

고도의 기술과 예술의 터치로 조명을 받으며 펼쳐지는 관능미 넘치는 집시의 향연은 새벽의 여명이 무색케 할 정도로 황홀한 밤을 지새우게 했다. 투우와 플라멩코! 나 역시 황소의 피를 보며 잔인함을 즐기고, 그리고 집시들이 추는 플라멩코의 유혹속에 여지없이 빠져들어갔었다. 마드리드의 낮과 밤은 투우와 플라멩코로 이렇게 나그네의 가슴을 얼룩지게하며 영혼을 빼앗아 가는 환락의 낙원이다.

 

우리는 이사벨라 2세의 왕실 정원이었던 레띠로 공원에서 장미에 취하고, 쁘라도 미술관에서 흑과 백으로 연출되는 고야의 장중한 작품에 매료되기도 했다.

  

 

그러나 ‘태양의 문 Puerta del Sol’을 지나 스페인광장에서 만난 돈키호테와 산쵸는 돌연 나그네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동양의 친구여, 어서 오시게나! 나는 자네를 만나기 위해 500년 동안 이렇게 기다렸다네.”


거기, 마드리드의 하늘아래 정의 사자 돈키호테는 그의 애마 로시난테 위에 올라 부러진 창을 높이 들고 삐뚤어진 세상을 향해  정의를 부르짖고 있었다.  라만차의 정의의 기사 돈키호테가 들고 있는 이 '부러진 창'은 세상을 향한 이성이요, 정의의 상징이다.

 

신은 자연을 창조하고,
이성은 인간을 만들며,
인간은 도시와 문화를 건설한다.
그리고 인간은 평화를 갈구한다.

 

그러나 인간이 창조한 문화와 도시는 정의가 사라지면, 전쟁과 약탈로 얼룩지게 되며 평화는 멀어져 간다. 우리는 돈키호테의 부러진 창을 바라보며 그냥 웃어넘길 것이 아니라 반성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얼토당토하지도 않게만 생각을 할 게 아니라 그가 수없이 넘어지며 당하면서도 부러진 창을 들고 인류를 향해 부르짖는 의미를 새겨봐야 한다.   

 

 

아, 그 날 밤의 황홀함에 다시 취하고 싶다. 와인 잔을 기울이며 정열적인 플라멩코의 리듬과 집시의 춤에 취하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산쵸를 다시 만나고 싶다.

 

그러나 우리들의 오늘 최종 종착지는 유럽의 끝 포르투갈의 리스본이다. 리스본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위해서는 차마르틴 역으로 가야 한다. 공항에서 차마르틴 역까지 가는 메트로를 타기위해 1유로를 주고 티켓을 산다. 여기서도 유로가 그대로 통용이 되니 편하기는 하다. 하나의 유럽, 하나의 통화.

 

차마르틴 역에 도착을 하여 리스본으로 가는 기차시간을 알아보니 밤 10시 30분에 있다. 마드리드에서 리스본까지 기차요금은 1인당 51.5유로. 마드리드는 몇 년 전에 이미 여행을 한 적이 있으므로 그냥 통과하기로 했던 것. 그러나 출발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 기차표를 사들고 큰 배낭을 라커에 맡긴 후 밖으로 나가 거리를 산책한다.

 

플라자 디 카스틸라 Plaza de Castilla 광장까지 걸어간다. 광장에는 쌍둥이 키오 타워 Kio Towers가 넘어질듯 우람하게 서 있다. 114미터에 이르는 27층의 건물은 마치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지게 지어져 있어 건축미가 돋보인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두 개의 건물 모습이 매우 독특하다. 이 현대적인 건물이 마드리드가 얼마나 다이내믹한 곳인지를 나타내주고 있다. 두 건물이 만들어 내는 사다리꼴 형태의 공간이 어디론가 안내하는 문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건물의 공식 명칭은 '푸에르토 데 유로파(Puerto de Europa)'로 '유럽의 관문'이라는 의미이다. 마드리드 비즈니스로 거리 들어가는 관문인 샘.

 

 

 

우리는 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 갑작스럽게 비를 만나 맥도날드 가게로 들어간다. 한 떼의 마드리드의 어린이들도 비를 피해 맥도날드 가게로 우르르 몰려든다. 아이들은 어디를 가나 아이들이다. 웃고 떠들고 재롱을 피우는 모습이 귀엽기만 하다. 커피를 한 잔씩 하고나니 비가 갠다.

 

마드리드 차마르틴 역. 밤 10시 34분.

우리는 그 날 밤의 추억을 곱씹으며 리스본 행 332호 열차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