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두에 젖은 리스본의 밤
검은 돛배(Barco Negro)
난 해변에 쓰러져 있었고
눈을 떴지
거기서 난 바위와
십자가를 보았어
당신이 탄 돛배는
밝은 불빛 속에서
너울거리고
당신의 두 팔은 지쳐서
흩어지는 것 같았어
뱃전에서 당신이 내게
손짓하고 있는 것을 보았지
그러나 파도는 말하고 있었어
당신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아나폴리아 역에서 우리들의 숙소인 리스본 센트럴 호스텔로 가려면 90번 버스를 타라고 안내서에 적혀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 버스는 오질 않는다.
빵모자를 뒤집어 쓴 라틴계의 가냘픈 아가씨가 자신의 몸보다 더 큰 배낭을 걸머지고 버스정류소에 서 있다.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 그녀도 우리와 같은 호스텔로 간단다. 그녀의 이름은 알리시아. 멕시칸 걸이다. (사진:리스본 발견의 탑)
우리는 기다려도 오지 않은 90번 버스를 포기하고 알리시아와 함께 46번 버스를 탄다. 버스에 오르니 흐느끼는 여자가수의 노래가 구슬픈 멜로디와 함께 흘러나온다.
파두(Fado)다!
물결치는 파도처럼 몰려왔다가 사라져 가는듯한 서글픈 음악, 파두. 뱃사람들의 노래... 슬픔, 고독, 이별, 상실, 그리고 노스탤지어의 그리움을 노래하는 파두! 라틴어의 'Fatum 운명'이란 단어에서 파생된 파두는 인간의 숙명을 노래하는 포르투갈의 민중음악이다.
한 때 배를 타고 세계 정복에 나섰던 포르투갈은 이제 거의 빈손으로 유라시아의 대륙 서남쪽 구석에 작게 웅크리고 있다. 그러나 거기, 리스본 항구에서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노라면 저절로 파두의 음률에 젖게 된다.
검은 파도처럼 흐느끼는 선율, 파두를 모르고서는 포르투갈의 문화를 이해할 수가 없다. 파두는 Football, Fatima와 함께 포르투갈의 3F라 불릴 정도로 유명하다.
파두는 항구도시 리스본의 알파마지구 선술집에서 처음 등장했다. 파두의 초기 역사를 장식한 ‘파디스타(파두가수)’는 집시 여인 마리아 세베라이다.
그녀의 노래는 사람들의 심금을 쥐어짜는 듯 사로잡았고, 이후 포르토 와인, 아줄레주(장식타일)와 함께 포르투갈의 주요 문화 상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세베라가 세상을 떠난 후 집시들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검은 가운을 입고 노래를 한 것이 전통이 되어 오늘날까지 파디스타들은 검은 가운을 입고 파두를 부른다.
산타 아폴로니아 역에서 대서양과 만나는 테주Rio Tejo 강변을 버스를 타고 가는데 파두의 선율은 더욱 슬프게 가슴을 파고든다. 나중에 곡을 알고 보니 포르투갈의 국민적인 파디스타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검은 돛배(Barco Negro)’란 노래란다.
고기잡이를 갔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남편을 기다리며 수평선 너머로 흘러 보내는 아내의 눈물을 담은 노래. 검은 돛을 단 배는 남편의 죽음을 의미한다. 파두 선율은 우리네 한(恨)을 담은 정서와 비슷하다.
파두를 듣고 있노라니 어느 비오는 날 기차를 타고 목포역에 도착하여 들었던 '목포의 눈물'이 갑자기 생각난다. 목포의 눈물. 5천만 한민족의 한을 담은 노래.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고, 부두의 새아씨 아롱 젖은 옷자락…' 슬픈 가락. 파두가 그렇다. 파두와 목포의 눈물이 무슨 연관이 있으리오마는 둘다 민중의 슬픔을 담은 공통점이 있다.
버스는 파두의 탄생지 알파마 지구를 돌아간다. 알파마 지구는 오르락내리락하는 언덕배기가 많아 우리나라 달동네를 연상케 한다. 마치 목포항구의 유달산 기슭에 있는 언덕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처럼 보인다.(사진 :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알파마지구는 세베라 이후 ‘파두의 여신’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를 탄생시킨 곳이다. 그녀는 알파마의 슬럼가 극빈가정에서 열 명의 형제중 하나로 태어났다. 그녀가 한 살 때 어머니는 어디론가 도망을 가버리고 할머니 손에서 공장생활을 하며 자란 그녀의 유일한 위안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열아홉의 나이에 마침내 파두에 데뷔를 하였고, 포르투갈 서민들의 정신을 휘어잡는 불멸의 파디스타가 되었다.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가 지금 흐르고 있는 ‘검은 돛배 Barco Negro'이다.
▲물결무늬를 이루고 있는 로시우 광장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로시우 거리에 내린다. 로마풍의 분수 앞에 고풍스런 국립극장 건물이 있고, 거리의 바닥에는 파도 무늬가 물결치듯 그려져 있다. 리스본의 중심가 거리에도 이렇듯 검은 파도가 마치 파두의 노래처럼 물결치고 있다. 우리는 잠시 파도무늬 위를 서성거리다 45번 버스를 타고 피코아스 거리에서 내려 호스텔에 여장을 풀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에두아르두 7세 공원 앞에는 대지진으로 잿더미가 된 리스본을 다시 부활시킨 뽕발 후작이 동상이 우람하게 서 있다. 이곳에서 로시우 광장까지 곧게 뻗은 거리는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를 연상케 한다. 낙엽이 뒹구는 거리에는 배의 덫처럼 생긴 검은 문양이 줄줄이 새겨져 있다. 검은 물결, 검은 돛, 슬픔, 그리고 파두...리스본의 거리는 지금 내게 그런 느낌을 준다.
▲거리의 문양이 특이한 리스본의 리베르다데 거리
로시우 광장까지 걸어간 우리는 대지진에서 재건축된 바이샤지구의 크고 작은 가게 앞을 걸어 다녔다. 흰색과 회색의 돌들에는 물결무늬가 파도를 이루고 있다. ‘낮은 땅’이란 뜻을 가진 바이샤 거리는 레스토랑, 카페, 바, 상점들이 빼꼭하게 들어 서 있다.
바이샤 산타 주스타 거리에는 구식 엘리베이터가 우뚝 서 있다. 덜커덩 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나선형 계단을 밟고 한 층 더 올라가니 시가지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의 카페에 앉아 차를 한잔 시켜놓고 시가지를 내려다본다. 오늘따라 날씨가 흐려서 그런지 어둡고 슬픈 노래 파두가 전망대의 카페에서도 흘러나오고 있다.
건너편엔 ‘상 조르제 성’이 우람하게 서 있다. 이 성은 로마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저 화려한 성에서 길을 따라 내려가면 서민의 애환을 담은 알파마 지구의 슬럼가로 이어진다.
알파마의 매력은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 길이다. 언덕배기에 늘어선 공동주택, 어지러이 널려진 빨래와 화분, 빛 바랜 베란다... 붉은 기와로 올린 지붕아래에는 하얀 벽으로 된 3층 내외의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바이루알토 거리의 어느 동상앞에서
전망대에서 내려와 언덕을 올라간다. 바이샤 거리에서 언덕배기에 올라서면 바이루알토 거리로 이어진다. 리스본 문화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거리. 복잡하게 얽힌 길 사이로 오래된 트램들이 정겹게 오가고 있다. 거리에는 오래 된 카페들과 레스토랑이 있고, 로비에서 맥주와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한가롭게 환담을 나누고 있다.
밤이 되자 우리는 어느 낡은 파두 클럽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포루트 와인을 마시며 검은 가운을 입고 파두를 부르는 삼류 파디스타의 흐느끼는 듯한 노래를 듣는다. 와인 한잔에 밀려드는 파두의 나른한 선율이 온 몸을 휘어 감는다.